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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유산] 가난해도 괜찮아, 바른길 아니면 타협하지 마라

1 이 기사는 2016-06-29 오전 00:01:00 에 실린 기사입니다.

문배주 빚는 이기춘·이승용 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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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희동 자택에는 고 이경찬씨와 이기춘 명인, 이승용 전수자에 걸친 3대의 추억이 서려 있다. 이 명인은 “혼자 힘으로 이룬 것은 하나도 없다”며 “선택의 기로에 놓일 때마다 선친의 가르침이 큰 힘이 됐다”고 말했다.

평양 술도가로 명성 날리다 6·25 때 월남
양곡관리법으로 문배주 등 곡주 제조 금지
“알코콜 섞은 희석식 소주는 안 만들겠다”

1986년 문배주 무형문화재 지정 후 재기
5대째인 이승용씨도 가업 잇는 전수자로
“자녀에겐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줘야”


이기춘(73) 명인은 문배주를 빚는 평양 양조장집 아들로 태어났다. 남부러울 것 없는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한국전쟁과 피난을 겪으며 인생이 달라졌다. 정부가 가양주 제조를 금지하면서 가업을 내려놓아야 했다. 가난과 싸우며 방황했다. 하지만 지금 이기춘 명인은 행복하다. 30여 년 만에 규제가 풀리며 가업을 다시 잇게 됐고, 총명하고 수완 좋은 아들 이승용(40)씨도 5대째 전수자가 됐다. 적어 무뚝뚝해 보이는 부자(父子)지만, 한두 마디만으로도 뜻이 통하는 속정 깊은 사이다.

‘가난해도 괜찮다, 눈앞의 이익에 일희일비하지 말라’던 선친의 가르침은 오늘의 이기춘·이승용 부자를 만들었다. 이 명인은 “아들과 마주 앉아 옛날 얘기를 하고, 내일 일에 대해 대화할 수 있는 지금 이 순간 더 이상 바랄 게 없다”고 했다.

경호원이 따라다니던 양조장집 아들

지난 2일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에서 문배주 제조기능보유자인 이기춘 명인을 만났다. 그의 집 안쪽 방에는 고조할머니부터 할아버지 이병일씨, 선친 이경찬씨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 있었다. 이기춘 명인은 사당에 있는 위패와 물건들을 하나하나 설명해주며 어린 시절 얘기부터 들려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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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들의 위패와 사진을 모신 사당. 맨 왼쪽부터 이기춘 명인의 할머니 박옥성씨와 할아버지 이병일씨, 가운데가 어머니 김옥수씨와 아버지 이경찬씨, 맨 오른쪽이 증조부 내외인 이몽제씨와 박씨 할머니(당시 여성에게는 이름이 없는 경우가 많았다) 사진이다

평양시 감흥리에서 3남 2녀 중 맏이로 태어난 소년 이기춘은 동네 아이들과는 먹는 거나 입는 거, 갖고 노는 게 좀 달랐다. 당시로선 귀하던 자전거를 타고 친구 집에 놀러 갔고, 가정교사와 함께 스케이트를 배웠다. 집에는 당시엔 국내에선 보기 힘들던 카메라도 있었고 간식으로는 초콜릿과 알록달록한 사탕을 먹었다. 소년이 집을 나서면 덩치 큰 경호원 두 명이 따라나섰다. 소년은 툭하면 경호원을 따돌리고 친구들과 극장으로 도망가서 영화도 보고, 산과 들을 쏘다니며 자랐다.

이 명인의 집안은 평양에서 누구나 알아주는 커다란 양조장을 운영했다. 이곳에서는 고려 태조 왕건에게 진상됐던 궁중 술 ‘문배주’를 빚었다. 손끝이 야무지던 증조할머니가 궁중에 전해지던 기술을 전수받아 집에서 술을 빚기 시작했고, 할아버지 이병일씨, 아버지 이경찬씨가 양조장을 설립했다. 그후로 평양의 유명한 술도가로 명성을 날렸다.

누룩방에서 태어나 누룩 냄새를 맡으며 자란 이 명인에게 최고의 놀이터는 양조장이었다. 아버지가 소유한 양조장 중에 평양 시청 앞에 있는 누포리 양조장이 제일 컸는데, 아버지를 찾으러 거길 가면 SF영화 세트장 같은 거대한 실험실이 있었다. 반짝이는 불빛, 실린더, 흰옷을 입고 일하는 과학자들은 소년의 눈에는 신기해 보였다. 아버지에게 왜 술 만드는 데 저런 시설과 사람들이 필요하냐고 물으면 아버지는 “좋은 균을 찾으면 술이 더 맛있어진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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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에서 살던 시절의 대가족 사진. 맨 뒷줄 왼쪽부터 일곱번째가 이기춘 명인의 어머니 김옥수씨, 그 옆이 아버지 이경찬씨다.

-아버지의 모습을 어떻게 기억하나.

(이기춘 명인)“선친은 술만 많이 만들어서 팔면 그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더 많이 연구하고 고민하지 않으면 남들과 똑같아진다고 말씀하셨다.”

-사람을 귀하게 여기라는 건 아버지의 가르침이었나.

“감흥리에 있는 양조장에서 한 직원이 숯을 훔치다 동네 사람들에게 걸려 인민재판에 회부됐던 적이 있었다. 재판에 회부되면 실형은 물론 수용소로 보내져 처형당하던 시절이었다. 섣부르게 죄를 감싸도 같은 처지가 됐다. 하지만 증언 위해 단상에 올라간 아버지는 대뜸 “숯 한 짐 선물로 줬던 걸 잊어버리고 멍청하게 왜 도둑 누명을 썼느냐”며 직원을 두둔했다. 그리고 그 직원을 다시 채용했다. 6·25 전쟁 때 공장 직원들 모두가 공장을 떠났지만, 그 직원 하나만 남아 공장을 지켰다. 아버지는 그 이야기를 내게 가끔 들려주며 ‘사람을 귀하게 여기면 더 큰 보상이 온다’고 하셨다.”

-엄한 아버지였을 것 같다.

“그렇지 않았다. 자녀들의 일에 크게 간섭하거나 지시하지 않았다.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주시는 아버지였다. 하지만 제사 때는 달랐다. 1년에 몇 번 있는 제삿날만큼은 꼭두새벽부터 나를 깨워 옷차림, 말투, 절하는 방식 하나하나를 꼼꼼히 가르치셨다. 절을 성의 없이 한다고 혼을 내고, 술을 대충 따른다고 혼을 냈다. 남쪽으로 피난 와서도 마찬가지였다. 당시엔 가양주 제조가 불법이라 정부의 눈을 피해 아주 소량의 술만을 빚어 제사상에 올렸는데 그때도 제사에 정성을 다했다. ‘부유한 것도 가난한 것도 모두 조상의 덕’이라고 강조하며 ‘지금 내 신세가 어떻든 선조들에게 늘 감사하고 지금의 나를 되돌아보라’고 하셨다.”

30년 동안 술을 빚지 않은 아버지

1950년 발발한 한국전쟁으로 가족들은 남쪽으로 내려왔다. 100여 명의 식솔과 함께 51년 1·4후퇴 때 부산 보수동으로 피난을 갔다. 처음엔 수십 대나 되는 고급 세단과 트럭에 금괴를 가득 싣고 보수동 적산가옥으로 갔다. 그랬다가 다시 제주도로, 그리고 또다시 부산으로, 그다음엔 다시 서울로 옮겼다. 그 사이 그 많던 재물과 함께하던 사람들이 조금씩 사라졌다. 하지만 이 명인의 가족들은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문배주 만드는 기술이 있으니 재기하는 건 어렵지 않을 거라고 낙관했다. 하지만 55년 곡식을 술 빚는 데 쓰지 말라는 정부의 양곡관리법이 발효되면서 문배주 만드는 기술은 무용지물이 됐고 재기도 불가능해졌다.

사실은 재기해서 더 큰돈을 벌 수도 있었다. 정부 지시대로 알코올에 물을 섞은 희석식 소주를 만들면 됐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런 술은 만들지 않겠다”고 단칼에 거절했다.

“지금도 생생히 기억합니다. ‘차라리 사람들에게 독을 먹이라고 하라’며 화를 내시던 아버지의 모습을요.”

그 후 30년 동안 아버지는 술을 빚지 못했다. 아버지 밑에서 일을 하던 한 직원은 희석식 소주를 만들어 국내 최대 주류 회사를 거느린 부자가 됐다. 그 모습을 30년간 지켜보면서도 아버지는 흔들리지 않았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다시 술을 빚지 못하는 일이 있어도 진짜가 아니면 절대 타협하지 말라”고 했다.

술을 빚을 수 없었던 아들은 대한항공에 입사했다. 대한항공에서 17년간 근무하며 술 빚는 일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다. 하루는 그가 항공사 작업복을 입고 일을 하는데 옛날 평양에서 일했던 나이 든 직원이 이 명인을 알아보고 달려와 “왜 처지가 이렇게 됐냐”며 펑펑 울었다. 하지만 본인은 개의치 않았다. 누군가에게는 ‘망해서 그런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가족을 위한 삶에 충실한 스스로를 떳떳하다고 여겼다. 아버지에게 그 얘기를 들려줬지만 무뚝뚝한 아버지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86년 정부가 분야별 무형문화재 지정에 나서면서 전통주 분야 문배주 제조기능보유자로 아버지가 지정됐다. 아들 이기춘씨와 손자 이승용씨도 후계자로 지정됐다. 아버지는 연희동 집에 작은 양조장을 만들고 술을 빚기 시작했다. 당시 대한항공에서 근무하던 아들 이기춘씨도 일이 끝나면 그곳으로 달려가 아버지와 함께했다. 그토록 기다리던 문배주 양조 허가가 난 건 90년이었다. 아버지는 3년 후 작고했다.

“아버지는 굴곡 많은 인생을 사셨지만 마지막 순간 여한은 없으셨을 겁니다.”

그는 지금도 1~2주에 한 번씩 경기도 의정부에 있는 아버지의 산소에 간다. 자식 된 도리이기도 하고, 아버지가 보고 싶어서이기도 하다. 이 명인은 “놀아도 그 동네에서 산소를 보며 쉬는 거예요. 우리 아버지도 그랬거든요”라고 말했다.

부모가 아이 미래를 정하면 안 돼

이 명인의 아들인 이승용 전수자는 이 명인과의 인터뷰가 끝날 무렵 집에 도착했다. 아버지에게 반듯하게 인사하고 자리에 앉았지만 살갑게 안부를 묻거나, 싹싹하게 아버지를 챙기는 다정한 모습은 아니었다. 원래 그러냐 물으니 “원래 우리나라 아버지와 아들 사이가 다 이렇게 무뚝뚝하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렇던 ‘무뚝뚝’하던 분위기는 이 전수자가 자신의 어린 시절 얘기를 꺼내면서 화기애애해졌다.

이승용 전수자는 어린 시절 할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다. 술을 좋아하고 사람을 좋아해 틈만 나면 친구들을 불러 평양냉면이나 콩국수를 대접했던 할아버지는 자신을 닮은 손자를 몹시 예뻐했다. 손자는 방학은 물론 주말에도 반포동에 있는 자신의 집을 놔두고 연희동 할아버지네 집에 왔다. 용돈을 받아 오락실에도 가고 군것질도 했다. 하지만 소년 이승용이 좋아하는 건 따로 있었다. 연희동 집 아래층에 있는 작은 부엌에서 할아버지와 노는 거였다. 거기서 할아버지는 아궁이 불을 땠고, 솥에 밥을 지었고, 그 밥을 맛보라며 손주에게 건네주기도 했다. 어렸을 때부터 맑은 술도 홀짝홀짝 마셨다. 그는 할아버지 옆에 앉아 불장난을 하고, 고슬고슬하고 달던 쌀밥의 맛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어린 시절의 이승용 전수자에게 그건 가업이 아니라 놀이였다.

아버지 이기춘 명인으로부터 문배주 제조법을 전수받은 건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대학교 3학년 때까지다. 그는 묵묵히 즐겁게 배웠다.

이제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된 이승용 전수자는 “부모가 아이의 미래를 정하고, 어떤 직업을 선택하라고 강요하는 건 아이에게 가장 큰 불행”이라고 생각한다.

“제가 술 빚는 인생을 택한 건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어린 시절의 즐겁고 행복했던 기억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가업을 잇겠다고 결정하지 않았더라도 아버지나 할아버지는 이해하셨을 거에요. 저 역시 제 아이들이 어떤 길을 선택하든 존중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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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춘 명인이 아들 이승용씨에게 쓴 편지. “하고 싶은 말이 많은데 무슨 말을 써야 할지 모르겠다”던 이 명인이 며칠에 걸쳐 썼다. 사춘기 반항 한 번 없이 착하게 자란 아들에 대한 고마움, 지금 하고 있는 일에 대한 격려, 손자에 대한 애정을 담았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로부터 받은 가장 큰 가르침을 꼽는다면.

(이승용 전수자) “일희일비하지 않는 법이다. 어른들은 순간의 이익을 위해 가치관을 내려놓고 빠른 길을 가지 않았다. 그걸 고스란히 지켜보면서 자랐다. 남들의 눈에는 답답해 보일 수 있겠지만 결과적으로는 그게 장기전을 치를 수 있는 무기가 된다.”

-본인이 두 아이를 키우는 원칙이라면.

“말로 하는 건 아무 소용이 없다. 부모가 먼저 행동으로 보여줘야 한다. 대학 다닐 때 김포에 위치한 양조장에 갔다가 아버지가 가장 바쁘게 뛰어다니는 걸 보고 놀랐다. 고된 일, 손 많이 가는 일은 직원들이 아닌 아버지가 다 했다. 그때 사장 아들이라고 ‘대충 하면 욕먹겠구나’하는 생각을 했다. 내 아이들에게도 뭔가를 알려주고 싶을 때 말로 잔소리 하지 않고 행동으로 먼저 보여주려고 한다.”

-아버지와 대화가 많은 편은 아닌 것 같다.

“아버지는 칭찬을 많이 하는 편이 아니다. 한참 문배주가 안 팔린 적이 있었는데 고민 끝에 도자기병이 아닌 유리병을 디자인해서 보여드린 적이 있었다. 아버지가 별말씀이 없으셔서 그런가 보다 했는데, 어느 날 “내 친구들이 병 예쁘다고 하더라”며 무심하게 한마디 하셨다. 그때 감동을 잊을 수 없다. 표현하는 방식이 너무 수다스럽거나 빈번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본인의 자녀들에게 강조하는 게 있다면.

“아이들이 역사책을 많이 읽었으면 좋겠다. 역사를 알면 겸손해진다. 생각이 막힐 때 역사 속 인물로부터 답을 찾기도 한다. 바깥세상에서 답을 구하지 못하고 내면에서 해답을 찾아야 할 때가 있다. 그때 역사책이 도움이 된다.”
 

| 이기춘 명인은

1942년 평양 출생.
51년 평양에 있는 가족들과 함께 1·4 후퇴 때 부산으로 피란.
55년 양곡관리법으로 곡주 제조 전면 금지.
62년 한양대 경영학과 입학.
73년 대한항공 기획조정실 입사.
86년 아버지 이경찬씨는 중요무형문화재 문배주 제조 기능보유자로, 이기춘·이승용 부자는 후계자로 지정됨.
87년 아버지 이경찬씨로부터 문배주 제조 전수 교육 받음.
92년 문배주 전수 교육 수료 후 무형문화재 후보로 지정됨.
95년 중요무형문화재 문배주 기능보유자로 지정됨.
□ 좌우명: 진실되게 살자.
□ 인생의 롤모델: 경복고등학교 남도영 역사 선생님.
□ 내 인생을 바꾼 책: 『삼국지』. 운명과 역사의 흐름은 어쩔 수 없는 영역이지만, 그 안에서도 최선을 다해 내 몫을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깨달음을 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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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영지 기자 lee.youngji@joongang.co.kr
사진=김경록 기자 kimkr8486@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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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지 기자lee.youngj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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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록 기자kimkr8486@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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