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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유산] 사람이 재산, 친구와 나눌 땐 네가 적게 가지라던 어머니

1 이 기사는 2016-06-15 오전 00:01:00 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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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31일 강윤선 대표(오른쪽)가 딸 김기정씨가 공부하고 있는 서울대를 찾았다. 강 대표는 이날 “딸과 함께 이런 시간을 보내는 건 처음”이라며 활짝 웃었다.

강윤선 준오헤어 대표 가족

‘인사를 잘하자. 청소를 잘하자. 먼저 전화하는 사람이 되자.’준오헤어 강윤선(56) 대표의 집 거실에는 이 세 문장이 쓰여 있는 크리스탈 액자가 있다. 그가 세 자녀에게 강조하는 삶의 태도다. 가난했지만 늘 “사람은 경우를 지켜야 한다”던 어머니가 강 대표에게 늘 하던 말이기도 했다. 강 대표는 열네 살 때부터 일해야 했다. 중학생이 된 친구들이 학교로 향할 때 그는 미용실에서 일했다. 일 나간 어머니를 기다리며 물릴 만큼 수제비를 먹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기죽지 않았다. 어머니의 든든한 믿음과 애틋한 지원이 있었고, 그 때문에 강 대표는 늘 당당했다. “내 딸에게도 내 어머니가 내게 주셨던 마음을 물려주고 싶다”는 강 대표와 “어머니는 내 인생의 롤모델”이라는 그의 딸 김기정(32) 씨를 만났다.


115개 지점 미용기업 키운 ‘흙수저’ CEO
“어머니는 돈보다 사람과 잘 지내라고 하셨죠
네가 300원 가질 때 남에게 400원을 주라고요”


거실엔 ‘인사를 잘하자’ ‘청소를 잘하자’ 글귀
손에서 책 안 놓고 새벽부터 인터넷 강의 들어
늘 미안한 워킹맘이지만 딸은 “엄마가 롤모델”



강 대표의 어린 시절 학력은 초등학교 졸업 후 미용전문학교를 나온 게 전부다. 배움에 대한 아쉬움은 그로 하여금 평생 책을 가까이하게 만들었다.

그가 미용학교 졸업 후 서울 돈암동에 열었던 작은 미용실은 이제 청담동에 있는 5층짜리 고급 헤어 살롱과 8층짜리 뷰티 아카데미로 성장했다. 준오헤어의 직영 지점은 현재 115개. 1억원 이상의 연봉을 받는 직원도 200명이 넘는다.

그래서 강 대표는 늘 바빴다. 액자에 삶의 태도를 새겨놓은 것도 그 때문이다. 자녀들을 만나 이야기할 시간이 많지 않았다. 이것만큼은 마음에 새겼으면 하는 내용을 아이들이 언제나 볼 수 있도록 적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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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대표가 자녀들을 위해 만든 크리스탈 패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생활 태도를 새겨 거실에 놓아뒀다.

“인사를 잘하면 어디 가도 대우를 받을 수 있어요. 예의 바른 사람에겐 누구나 좋은 인상을 받으니까요. 또 성공한 사람 치고 청소 안 하는 사람이 없어요. 세 번째 ‘먼저 전화하는 사람이 되자’는 사실 제가 가장 잘 못하는 거예요. 남에게 먼저 연락한다는 건 용기가 필요한 일이잖아요. 먼저 연락해서 사람들을 만나고 챙기는 용기를 아이들이 가졌으면 해요.”

강 대표는 24세에 지금 준오헤어의 CFO를 맡고 있는 남편 김현철씨와 결혼해 딸 하나와 아들 둘을 뒀다. 두 아들 원규(27)·민규(20)씨는 미국에서 공부 중이다. 기정씨는 미국에서 대학을 마치고 돌아와 현재 서울대 대학원에서 MBA 과정을 밟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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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윤선 대표의 가족사진. 남편 김현철씨와 딸 김기정씨, 아들 원규·민규씨와 함께했다.

“난 크림빵 싫다며” 늘 양보하던 어머니

강 대표는 ‘흙수저’의 전형이었다. “태어나서부터 가난했다”고 할 정도로 어린 시절의 기억은 가난, 그 자체였다.

생계를 책임졌던 어머니는 늘 해가 져야 집에 들어왔다. 손엔 늘 찌그러진 ‘삼립 크림빵’ 2개가 들려 있었다. 공사장에서 간식으로 먹으라고 인부들에게 나눠준 것이었다. 강 대표와 오빠는 크림이 도톰하게 들어간 크림빵을 서로 차지하려고 싸웠다. 강 대표가 “엄마는 왜 빵 안 먹느냐”고 물으면 어머니는 늘 “난 빵을 안 좋아한다”고 했다.

“그땐 그 말이 정말인 줄 알았어요. 나중에 철이 들고 난 후에야 우리를 위해 먹고 싶은 걸 참고 가져오신 거라는 걸 알았죠. 나 같으면 ‘너희 주고 싶어서 먹고 싶은 거 안 먹었다’고 했을 텐데 엄마는 단 한 번도 그렇게 말씀하신 적이 없었어요. 그저 묵묵히 우리가 먹는 걸 바라보셨죠.”

허리가 아파 일을 할 수 없는 아버지 대신 어머니가 평생 일을 했다. 특별한 기술이 없던 어머니는 공사장에서 잡부로 일했다. 아스팔트 도로포장 공사나 건설 현장에서 일했다. 그런 어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강 대표는 “기술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미용 기술을 배운 것도 그 때문이었다.

어머니가 잡부 일로 버는 돈은 많지 않아 집안 형편은 늘 빠듯했다. 언니와 오빠는 객지에서 일하며 돈을 벌었다. 강 대표도 14세 되던 해부터 작은 회사에 들어가 잔심부름을 했고 미용전문학교를 나온 후엔 미용실에서 직원으로 일했다.

남의 미용실에서 일하던 강 대표는 23세에 독립해 돈암동에 자신의 미용실을 차렸다. 돈이 없어 5부 이자 사채를 내서 어렵게 얻은 가게였다. 빚은 이후 2년 동안 매일 일수를 찍으며 갚았다. 다행히 가게가 잘돼 미용실은 2년 만에 5곳으로 늘었다.

미용실은 잘됐지만 힘들었다. 일이 너무 많아 늘 잠이 부족했다. 어머니는 강 대표의 지원군이 돼줬다. 아이들을 돌봐주며 저녁이면 미용실에 나와 청소를 해줬다. 그러면서 어머니는 딸에게 늘 “자라”고만 했다. 잠이 부족한 딸이 안쓰러웠던 어머니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말이었다.

자식에게 살갑지 않았던 어머니가 손주들만큼은 극진히 돌봤다. 강 대표는 “덕분에 우리 아이들은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랄 수 있었다”고 말했다. 강 대표의 큰딸 기정씨는 할머니 얘기가 나오자 눈물부터 글썽였다. “할머니는 우리를 늘 예뻐하셨어요. 무한한 사랑이 이런 거구나 싶었죠. 엄마의 빈자리는 잘 느끼지 못할 정도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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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세에 처음 한글을 배운 어머니는 강 대표의 이름 ‘강윤선’을 써서 보여주곤 했다. [사진 강윤선]

가난했어도 더 가난한 이웃 챙겨

어머니는 제대로 된 교육을 한 번도 받지 못한 분이었다. 한글도 80세에 교회에서 처음으로 배웠다. 강 대표는 80세 노모가 처음으로 자기 손으로 쓴 ‘윤이야 사랑해’란 메모를 보고 감동받았던 순간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일을 너무 많이 해 허리가 기역자로 휘셨어요. 요양병원에 들어간 후에야 글을 배우셨고, 종이접기 놀이 같은 걸 하면서 즐거워하셨죠. 그런 모습을 보면서 ‘우리 엄마도 좋은 집에 태어났으면 참 좋았을걸’하는 생각을 했어요.”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어머니였지만 딸은 어머니가 늘 훌륭하다고 생각했다. 사람 사는 방식을 제대로 가르쳐 주셨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아무리 힘들어도 힘든 내색을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평생 “힘들다”는 말을 한 번도 입 밖에 꺼낸 적이 없었다. 상냥하거나 살가운 편은 아니었지만 자녀에게 화를 내거나 야단친 적이 없었고 아버지와도 부부싸움 한 번 하지 않았다. 늘 덤덤했다. 그래서 강 대표는 “어머니는 원래 그렇게 안 힘든 사람인 줄 알았다.”

무뚝뚝했지만 언제나 자식들을 믿고 지지하는 어머니였다. 강 대표가 10대였을 때 한 남자가 동네까지 따라온 적이 있었다. 그 모습에 동네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은 어머니는 “따라오는 남자도 없는 게 바보지”라며 한마디로 정리했다. 강 대표는 “어머니의 그런 모습이 지금 날 이렇게 당당하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어머니의 믿음 덕분에 힘든 일이 있어도 금방 기운을 차릴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늘 주변 사람들을 챙겼다. 가족뿐 아니라 동네 불쌍한 사람들을 데려다 밥을 해 먹이고 형편이 더 어려운 친척을 데려다 몇 달씩 같이 살기도 했다. 초등학교 시절 강 대표는 공주가 그려진 분홍색 자석필통이 가지고 싶었지만 어머니는 그걸 사주는 대신 무지 공책을 여러 권 사서 강 대표 또래의 동네 아이들에게 나눠줬다.

“저는 그게 늘 불만이었어요. 그 돈을 모아서 내 필통을 사주면 될 텐데 엄마는 왜 안 그러는지, 어렸을 때는 이해가 안 됐어요. 하지만 나이가 들어 회사를 운영하면서 그 이유를 알 것 같아요. 내 자식만 중요한 게 아니라는 뜻이셨던 거죠.”

어머니는 돈보다 더 중요한 게 사람들과 잘 지내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사람들과 잘 지내라” “싸우지 마라”고 당부하면서 입버릇처럼 1000원을 나눠 가질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말해주곤 했다. ‘1000원을 세 명이 나눠 가질 때 두 명은 300원을, 한 명은 400원을 가지게 된다면 너는 꼭 300원을 가져오고 400원을 남에게 줘라’는 거였다. 지금도 강 대표가 리더십 강의를 할 때 종종 하는 이야기다. “네가 네 걸 다 가져가려고 하면 사람들과 잘 지낼 수가 없다. 잘 지내려면 반드시 양보해야 한다”는 게 어머니의 가르침이었다. 이는 강 대표가 회사를 경영하는 원칙이 됐다. 직원들에게 더 주고 자신은 덜 가져가는 것 말이다.

2년 전 95세로 돌아가시기 전까지도 어머니는 꼿꼿했다. 병원으로 강 대표 가족이 찾아가면 늘 “돌아갈 때 청소하는 아줌마랑 일하는 사람들에게 인사하고 가라”고 말했다. 가족들이 간병인에 대한 불만을 이야기하면 오히려 “그 사람들이 얼마나 힘든지 아느냐”며 “병원 사람들에게 함부로 하지 말라”고 호통을 쳤다. 그러면서 늘 하는 말이 “사람은 경우가 있어야 한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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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대표가 직원들에게 커트 시범을 보이고 있다. 회사에서 강 대표는 ‘함께 여행가고 싶은 사람’으로 꼽힌다.

“아이는 스스로 커야 한다”

강 대표는 밖에서 뭔가 좋은 걸 알게 되면 즉시 집에 와서 실천했다. 아이들이 어릴 땐 온 가족이 모여 일주일 동안 한 일, 그 일을 하고 느낀 점, 그리고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이야기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당시 아들 원규씨는 “오늘 한 친구를 만났습니다(한 일). 친구가 참 못생겼다고 느꼈습니다(느낀 점). 앞으로 그 친구와는 안 놀겠습니다(앞으로 할 일)”라고 발표해 웃음바다가 된 적도 있었다.

강 대표의 교육철학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자기 양육’이다. 자신이 스스로의 힘으로 자립했듯 자신의 아이들과 직원들이 스스로를 양육해 성장하길 바란다는 의미다. 사업하느라 바빴을 텐데 어떻게 자녀들을 키웠느냐는 질문에 강 대표는 늘 “방임했다”고 답한다.

“전 아이들에게 해 준 것이 별로 없어요. 방임했죠. 아이들은 스스로 커야 하는 거고 제가 해줄 수 있는 일은 그럴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이잖아요. 저는 그저 잘 선택할 수 있도록 길을 보여주는 것밖에 없어요. 제가 유일하게 아이들에게 해주려고 애쓰는 건 사회에서 만난 여러 분야의 훌륭한 사람들을 만날 기회를 만들어 주는 거예요.”

2500명의 직원을 친구처럼 대하는 강 대표가 가장 어려워하는 사람은 바로 딸이다. 늘 엄마 말이라면 뭐든 거역하지 않고 따르는 딸인데도 그렇다.

인터뷰는 두 번에 걸쳐 이뤄졌다. 첫 번째는 지난달 23일 준오헤어 청담동 사무실에서 강 대표를 만났고, 두 번째는 지난달 31일 딸 기정씨의 학교로 찾아가 강 대표와 딸 기정씨를 함께 만났다. 강 대표는 “이 인터뷰가 계기가 돼서 딸과 친해질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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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윤선 대표가 딸 김기정씨에게 쓴 편지. 딸에 대한 사랑과 말로는 하지 못했던 결혼 걱정을 담았다.


-흙수저에서 성공한 기업가가 되기까지, 그 비결은 뭔가.

강윤선 대표 “아무리 생각해도 하나밖에 없는 것 같다. 난 사람을 좋아한다. 손님도 직원도 모두 좋아한다. 미용실이 이렇게 잘된 건 손님이 많이 찾아준 덕분이고, 지점이 115개까지 늘어난 건 직원들이 회사와 함께해서다. 그 바탕에 서로 좋아하는 마음이 있다고 생각한다. 손님이 가게에 오는 게 너무 고마워서 돌아가는 길에 비가 오면 손님을 버스정류장까지 모셔다드리곤 했다. 직원들이 다른 곳에 안 가고 남아있어 주는 것도 정말 고맙다. 그들이 이 회사와 함께한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무조건 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녀 모두를 미국으로 유학을 보냈는데.

강 대표 “애들을 미국에 보내야 겠다고 생각한 건 사실 영어 때문이었다. 내가 영어에 한이 있다. 어릴 때 영어 공부를 못했더니 나이 들어 아무리 애를 써도 영어가 안 된다. 지금 세 아이는 영어를 굉장히 잘한다. 하지만 국제전화를 할 때면 ‘엄마는 영어 못하니까 한국말로 해라’고 한다.”

-어떤 엄마였나.

딸 기정 “친구 같은 엄마예요. 엄마는 우리와 장난도 치고 농담도 하며 친구같이 대하셨죠. 그러면서도 엄한 데가 있고, 사람은 늘 배워야 한다는 말을 귀에 못이 박이도록 했어요.”

-공부하라는 말 많이 들었겠다.

딸 기정 “어릴 때는 좀 그랬죠. 하지만 기분 나쁘게 들린 적은 없어요. 왜냐하면 엄마가 늘 공부하고 있었으니까요. 엄마는 지금도 늘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아요. 집에서도 얼마나 바쁜지 몰라요. 아침에 일어나면 늘 새벽부터 인터넷 강의를 틀어놓고 듣고 계세요. 그러다 런닝머신 위에서 운동하고, 또 조금 있으면 책을 보고 계세요. 부지런한 엄마를 보면서 저도 닮고 싶지만, 사실 잘 안돼요.”

-이미 성공한 기업인인데 끊임없이 배우고, 또 아이들에게 배우라고 하는 이유는.

강 대표 “나는 너무 절실했어요. 기댈 곳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거든요. 지금도 한양대 사이버대 상담심리학과에 다니고 있어요. 배우면 배울수록 즐겁고 내가 커가는 느낌이 들어요. 아이들도 그걸 느꼈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또 다른 이유는 내가 바쁜 엄마라서요. 아이들에게 늘 미안해요. 제가 채워줄 수 없는 걸 배움을 통해 얻었으면 좋겠어요.”

강윤선은
1960년 서울 출생
73년 서울 미동초등학교 졸업
78년 무궁화기술고등학교 졸업
82년 성신여대 앞 ‘준오미용실’ 개점
86년 같은 동네에 첫 번째 직영점 개점
90~96년 영국 비달사순 아카데미 수료
92년 ‘준오 아카데미’ 설립
98년 한양대 대학원 경영 컨설트 과정 수료
99년 대전보건대 초빙교수
2002년 헤어살롱에 전문 경영인 시스템 도입
2003년 영국 로얄 알버트홀 헤어쇼
2005년 안양과학대 겸임·전임강사, 세계 10대 헤어 브랜드 선정
2007년 청와대 특강, ‘인터내셔널 트렌드 비전 어워드’에서 한국 최초로 골드 트로피 수상
2008년 한성대 예술대학원 겸임교수
2009~2014년 경복대 겸임교수
2011년 보건복지부 장관상
2011년~현재 서경대 대학원 특임교수

□ 좌우명: 즐겁게 살다 의미있게 죽자

□ 인생의 롤모델: 배상민 교수. 늘 롤모델이 바뀌는데 요즘엔 디자인으로 세상을 이롭게 만들자는 배 교수의 철학에 동감해 롤모델로 꼽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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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윤경희 기자 annie@joongang.co.kr
사진=김경록 기자 kimkr8486@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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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경희 기자anni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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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록 기자kimkr8486@joongang.co.kr
강남통신·열려라공부 사진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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