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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유산] 백일 때부터 책 읽어주니, 나중엔 아이 혼자 수천 권 읽더군요

1 이 기사는 2016-04-27 오전 00:10:00 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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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천 국립생태원장 가족

소년은 자연을 벗 삼아 놀았다. 강원도 강릉에서 지낼 때는 물론 서울에 올라온 후에도 남산에 올라 개울에서 가재를 잡았고, 방학만 되면 강릉에 내려가고 싶어 몸이 근질거렸다. 중학생 때 백일장에서 장원을 한 뒤로는 시인이 되기를 희망했고, 고등학교 때는 미술가를 꿈꿨다. 이화여대 에코과학부 석좌교수이자 국립생태원 초대원장인 최재천(62) 원장 얘기다. 서울 경복중·고와 서울대를 졸업하고 하버드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후, 미시건대·서울대를 거쳐 현재 이화여대에서 교수 생활을 하는 그다. 얼핏 보면 자신의 적성을 잘 찾아 승승장구한 것 같지만 어렸을 때부터 하고 싶은 일이 많았던 탓에 적지 않게 방황했다. 하지만 그 덕분에 인문·사회·과학·예술을 넘나드는 통섭학자가 될 수 있었고 ‘알면 사랑한다’는 깨달음도 얻었다. 


‘남자는 하늘 여자는 땅’ 전 그렇게 자랐죠
반대로 물렁팥죽 아빠가 되기로 결심했어요
자유롭게 자란 아들, 봉사하며 사랑을 나눠


한땐 이기적으로 잘못 키웠다 오해한 적도
서로 잘 모르면 갈등, 알면 사랑할 수밖에
가부장적인 아버지의 사랑도 이젠 압니다



자식 교육만큼은 양보가 없던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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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천 원장이 한 살 때 육군 장교였던 아버지(왼쪽)와 어머니와 함께 찍은 가족사진.


“남자는 하늘, 여자는 땅이라는 말 있죠. 딱 유년시절 우리 집 얘깁니다.” 최재천 원장의 아버지는 육군사관학교 출신 직업군인이었다. 전형적인 가부장이었던 아버지 앞에서 어머니는 숨도 제대로 못 쉬었다. 완벽주의자였던 아버지는 퇴근 후에도 집에서 일할 때가 많았고, 장남이었던 최 원장을 포함한 4형제는 아버지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도록 최대한 조용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형제끼리 치고받고 장난치는 왁자지껄한 풍경은 그의 집에서 찾아보기 힘들었다. “아버지가 떠먹은 밥에서 ‘아작’ 하고 돌이라도 씹히면 아버지는 씹던 밥을 뱉고 ‘탁’ 하고 숟가락을 내려놨어요. 어머니는 그대로 상을 물린 후 다시 쌀을 씻고, 밥을 지었죠. 당시에 어머니가 들고 나가던 상이 ‘달달달’ 떨리던 게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그런 날이면 어머니는 아버지한테 밤새 혼이 나셨죠. ‘집에서 뭘 하느라 밥도 제대로 못 하느냐. 사람이 완벽해야 한다. 실수가 있으면 안 된다’는 얘기를 들으면서요.”

그런 아버지 앞에서 어머니가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는 건 딱 하나, 자녀 교육에 관한 일뿐이었다. 군인이라는 직업의 특성상 이사를 자주 다닐 수밖에 없는 상황이 아이들에게 좋지 않다고 판단한 최 원장의 어머니는 서울 오빠 집에 아이들을 맡겼다. 최 원장이 초등학교 입학도 하기 전이었다. “어디서 공부하는 게 무슨 상관이냐. 강원도 산골에서 사과 궤짝 엎어놓고 공부해도 잘될 놈은 다 잘된다”고 남편이 윽박질러도 물러서지 않았다. “아버지는 그럴 수밖에 없으셨을 거예요. 강원도 시골에서 농사지으면서 공부해서 고2 때 육군사관학교에 4년 장학금 받고 합격하셨거든요. 강원도 전체에서 혼자 합격해 천재 소리깨나 들으셨나 봐요. 어렸을 때 시골에 가면 어른들이 다 아버지를 알 정도였죠.”

 
4형제 중 3명이 대학교수로 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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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에 있는 할아버지 댁에서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삼촌, 둘째 동생과 함께 찍은 사진. 오른쪽 꼬마가 최 원장.


최 원장 어머니의 교육열은 어떤 상황에서도 꺾이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4형제 뒷바라지 확실히 하겠다”는 말을 자주했다. 초6 때 고액 과외를 받은 것도 그의 어머니의 뜻이었다. 당시에는 중학교 때부터 입시가 시작됐는데, 명문중에 입학해야 명문고·명문대에 진학하는 게 수월했고, 자연스레 명문중 합격생이 많은 초등학교가 인기였다. 그의 어머니는 서울 우신초에 다니던 그를 서울 교동초로 전학시킨 것도 모자라, 성적이 만족할 만큼 나오지 않자 과외 선생을 수소문해 나섰다. 당시 반 아이 중 대다수가 과외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 원장의 집은 형편이 넉넉하지 않을뿐더러 동생이 심장병을 앓으면서 가세는 점점 기울고 있었다. “당시 아버지 월급으로 동생 병원비를 내는 것도 버거웠을 거예요. 그런 상황에서 과외를 받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어린 나이에도 많은 생각을 들게 했습니다.”

궁하면 통한다고 했던가. 아버지의 반대에도 뜻을 굽힐 줄 모르던 어머니는 방법을 찾아냈다. 아버지 밑에서 군 복무를 했던 사람이 유명한 과외 선생이 됐다는 정보를 입수한 거다. 그날로 최 원장의 손을 잡고 과외 선생을 찾아갔고, 간곡하게 부탁했다. 과외 선생보다 다른 팀원 엄마들이 이구동성으로 반대하고 나섰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게 함께 과외받는 애들이 병원장 아들, 체신부 차관 아들 등 최상위층 애들뿐이었어요. 다른 엄마들은 ‘서울 변두리 출신을 끼워줄 순 없다. 우리 애들까지 수준이 떨어지면 어떻게 하느냐’고 입을 모았죠.” 하지만 그의 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우리 애는 없는 셈 쳐도 되니 제발 받아만 달라”고 애원했다. 그때 그 모습을 보면서 최 원장은 자신도 모르는 무언가가 심장에서 꿈틀거리는 걸 느꼈다. 분노와 오기 등이 복잡하게 얽힌 감정이었다. “자존심도 상했고, 공부를 열심히 해야겠다고 마음도 먹었어요. 어머니의 이런 기대는 학창시절 내내 저에게 등대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방황하다가도 제자리를 찾아오게 하였거든요. 4형제 중에 3명이 대학교수가 된 건 모두 다 어머니의 교육열 덕분입니다.”

 
“어디 감히 여자가 먼저 전화를 해”

아버지의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인 모습을 보고 자란 탓에 닮을 수밖에 없었다. 대학교 때 여자친구가 먼저 전화하면 “어디 감히 여자가 남자한테 먼저 전화를 하느냐”고 할 정도로 남존여비 사상이 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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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원장이 중학교 2학년 때 나간 백일장에서 장원에 뽑힌 후 받은 메달을 목에 걸고 기념사진을 찍은 모습.


-지금의 모습을 보면 상상이 안 간다.

“그때는 정말 그랬다. 아버지의 모습이 싫으면서도 나도 그렇게 자라게 되더라. 하지만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진화생물학이라는 학문을 공부하면서 180도 달라졌다. 세상을 열린 시각으로 보고 배우게 됐다. 지금의 아내를 만난 것도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장인어른도 교수였는데, 같은 한국에서 자랐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자유분방한 집안이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스스로 변하게 됐다.”

-아버지에게 배운 점도 있을 텐데.

“어머니한테 모질게 대한 것만 빼면 마음속 깊이 존경한다. 아버지는 바를 정(正)자처럼 인생을 사는 분이다. 청렴결백 그 자체다. 원리원칙을 벗어나는 일을 하는 걸 본 적이 없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일이 인상 깊이 남아 있다. 학교를 마치고 별생각 없이 방문을 열었는데, 양복 입은 신사 앞 박스에 돈다발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렇게 많은 돈은 본 적이 없었다. 놀라서 문을 닫고 나왔는데, 잠시 후에 따귀 때리는 소리와 함께 ‘네놈이 나를 어떻게 보고 이걸 가져왔느냐’는 호통이 들렸다.”

-청탁이 들어왔던 건가.

“당시 아버지는 육군 본부에서 제대반장을 하고 있었다. 제대를 일찍 시켜줄 수 있는 자리라 고관대작들이 청탁을 많이 했다. ‘제대반장 6개월만 하면 집 한 채 산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아버지는 단언컨대 단 한 번도 부정한 일을 한 적이 없다. 1960년대는 그런 일이 비일비재 했는데도 말이다. 덕분에 어머니는 지금도 ‘청렴’이라는 단어를 가장 싫어한다. 아버지가 조금만 덜 청렴했어도 집안 살림이 훨씬 더 넉넉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말을 남긴 고려시대 무신 최영 장군의 후손답다. 덕분에 나도 지금까지 다른 사람에게 피해 주지 않고 바른길을 가려고 노력하며 살아왔다.”

 
아들의 SAT 만점 비결은 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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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도 안 된 어린 아들을 무동 태운 최 원장. 아들이 그의 머리를 잡아당기며 즐거워하고 있다.


최 원장은 자신의 아버지와 달리 아이를 자유롭게 키웠다. 아내에게 우스갯소리로 ‘아들놈은 무슨 복을 타고 나서 나 같은 아빠를 만났느냐’고 할 정도였다. “어렸을 때 권위적이고 엄격한 아버지를 보면서 두 가지를 결심했습니다. 아버지가 밥 먹다가 돌을 씹고, 어머니가 떨면서 상을 내가고, 우리 형제들이 숨죽여 앉아 있을 때죠. 하나는 ‘나중에 결혼해서 아내가 해준 밥에서 돌이 나와도 아내 모르게 씹어 삼키겠다’는 거고, 또 다른 하나는 ‘아이에게 물렁팥죽 아빠가 돼주고 싶다’는 거였습니다.”

결혼 후 9년 만에 태어난 아이는 부부에게 보배나 다름없었지만, 둘 다 먼 이국땅에서 공부하느라 육아에는 서툴렀다. 그러던 중 우연한 기회에 훌륭한 교육법을 배울 수 있었다. 음악을 전공한 아내가 교회에서 성가대 지휘를 하면서 인연을 맺은 노부부가 아이를 보고 싶다고 집에 방문한 게 계기였다. “노부부는 백일밖에 안 된 아이에게 별의별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다 했어요. 어제 동네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졌고, 뉴스에서 대통령이 어떤 말을 했고,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말입니다. 저희가 의아하게 쳐다보니까 할머니께서 ‘아이가 알아듣지 못한다고 생각하느냐. 절대 그렇지 않다. 우리 말을 다 알아듣는다’고 하더군요. 머리를 망치로 한 대 맞은 것 같았죠.”

이후 육아법을 바꿨다. 잘 먹이고 재우고 ‘까꿍’만 하면서 하루를 보냈던 그들은 아이의 머릿속에 지식을 채워주려고 노력했다. 부부는 번갈아 가며 하루 있었던 일을 들려주고, 하루도 빠짐없이 책을 읽어줬다. 아이를 위한 책뿐 아니라 전공 책이나 논문도 아이 옆에서 소리 내 들려줬다. 부부뿐 아니라 당시 사감을 맡고 있던 하버드대 기숙사 학생들도 틈만 나면 아이에게 이코노미스트에 나온 기사와 학교 수업시간에 있었던 일에 대해 수다를 떨었다.

아이가 세 살 때는 이런 일도 있었다. 최 원장이 책을 읽어주다 피곤해진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곯아떨어졌는데, 아이가 혼자 힘으로 책을 읽고 있었던 거다. “글자를 읽는 게 아니라 책의 내용을 기억하고 있다가 소리 내 말한 거였죠. 책 한 권을 50번도 넘게 읽어줬으니 외울 만도 합니다. 하지만 언어를 습득하는 능력이나 기억력이 남달랐어요. 갓난아이 때 책을 읽어주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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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살 난 아들과 미국 코네티컷주에 있는 말 농장을 찾은 최 원장.


-아이가 꾸준히 독서를 좋아했나.

“대학 가기 전에 적어도 1000권, 많으면 수천 권의 책을 읽었을 거다. 분야를 가리지 않고 다방면으로 좋아했다. 외국인학교에 다닐 때 내신 성적이 형편없었는데도 미국 명문대에 합격한 거 보면 독서의 힘을 무시할 수가 없다. 아무런 준비 없이 미국 대학수학능력시험인 SAT를 치러도 늘 만점에 가까운 점수를 받았다. 아이에게 ‘좋은 점수 받는 비결이 뭐냐’고 물으면 답은 늘 똑같이 ‘아빠, 모든 책 속에 답이 있어’였다. 사실 학교는 거의 놀러 다녔다. 색칠하는 숙제도 하기 싫다고 안 할 정도였다.”

-많은 학생이 SAT에서 좋은 점수 받으려고 사교육까지 받는데.

“우리 부부도 아이를 SAT 대비 학원에 보냈었다. 하지만 작은 사건 때문에 일주일도 못 다니고 그만뒀다. SAT 시험 형식이 완전히 바뀌면서 학원에서 테스트를 치렀는데, 거기서 우리 애가 전 과목 만점을 받았다. 놀라운 일이긴 했다. 몇몇 학부모들이 ‘처음 치러진 형식의 시험에서 100점을 받는 게 말이 되느냐. 뭔가 이상하다’고 이의를 제기하기 시작했고, 아이가 ‘그만 다니겠다’고 하더라. 아이는 늘 ‘SAT는 아이큐검사와 비슷한 시험이기 때문에 미리 준비할 필요가 없다’는 논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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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31일 최재천 원장이 아들에게 쓴 편지. 현재 대학 졸업 후 미국에서 창업을 한 아들이 몸 건강히 지내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얼핏 보면 ‘엄친아’ 같은 아들이다.

“맞다. 전혀 부족함이 없이 자랐다. 한 마디로 치열함이 전혀 없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정도로 사랑하는 아들이지만 ‘잘못 키웠다’는 생각을 종종 했다. 내가 보기에 아이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만 하는 이기적인 성향이었다. 이런 아이를 세상에 내놨다는 사실에 자괴감에 빠지기도 했다. 아내는 나와 생각이 달랐다. 사랑이 넘치면 그만큼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베풀게 된다는 논리였다. 다행히도 이를 확인할 기회가 두 번 있었다.”

-어떤 일인가.

“아이가 대학 졸업 전에 폭탄선언을 했다. 친구들과 함께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에 가서 봉사활동을 하겠다고 말이다. 일 년 동안 그 지역 아이들에게 공부도 가르치고, 함께 농구도 하면서 새로운 삶의 기회를 주겠다는 계획이었다. 치안이 안 좋기로 유명한 곳이었기에 아내는 말리고 나섰다. 대만이나 말레이시아로 가라고 말이다. 하지만 아이는 ‘위험한 곳이기 때문에 내가 가야 한다’며 뜻을 꺾지 않았다. 당시에 솔직히 감동의 눈물을 흘릴 뻔했다. 우리 아들을 잘못 키우지는 않았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아이는 1년 동안 남아공에 머물렀고, 지역사회에 공헌한 점을 인정받아 남아공 정부가 주는 상도 받았다.”

-다른 사건은 뭔가.

“아이의 대입 자기소개서를 읽을 기회가 있었다. 대학에 지원할 당시에는 단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자기소개서였다. 학교 내신 성적은 바닥이고, SAT 성적만 우수했던 아이는 자기소개서에 자신의 내신 성적이 나쁠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 기가 막히게 철학적으로 변명을 늘어놨다. ‘자신은 이미 많은 걸 누리고 있고, 가진 사람이 더 가지면 세상은 아름답지 못할 것 같다’는 내용이었다. 쉽게 말하면 자신보다 부족한 사람들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 공부를 열심히 안 했다는 얘기다. 글이 어찌나 설득력이 있는지 읽는 내내 고개가 여러 번 끄덕여졌다. 나름대로 아이의 진면목을 발견한 일이었다.”

-‘알면 사랑한다’는 평소 철학이 통한 건가.

“그렇다. 아버지도 마찬가지다. 미워했던 때가 없는 건 아니지만 알고 보니 아버지도 큰 사랑을 갖고 계셨다. 미국 유학 갈 때 처음 느꼈다. 처음에 ‘유학 가겠다’고 했을 때 아버지는 완강히 반대했다. 아버지가 원하던 서울대 의대에도 두 번 떨어지고, 동물학과에 겨우 합격한 후에도 동아리 활동하고 노느라 공부는 뒷전이었던 아들이 ‘유학 가게 비용 좀 보태 달라’고 하니 나 같아도 당황스러웠을 거다. 하지만 그때는 정말 절실했고, 간곡히 요청했다. 내 뜻을 알아차린 아버지는 유학 자금을 대기 위해 당시 육군본부에서 스카우트 돼 근무 중이던 포항제철을 그만뒀다. 나중에 알고 보니 돈보다 나와 함께 시간을 보내려고 퇴직을 한 거였다. 유학길에 오른 후 열심히 공부하는 것만이 아버지 사랑에 답하는 길이라고 믿었다. 가족관계뿐 아니라 다른 인간관계도 그렇다. 상대방에 대해 알게 되면 더 사랑할 수밖에 없다. 왕따 시키던 아이를 우연한 기회에 만나 집까지 같이 걸어가면서 이야기를 나눴다고 생각해보자. 그다음에는 집에도 놀러 가고, 그 아이의 엄마한테 인사하고 난 후에도 그 아이를 따돌릴 수 있을까. 대부분 인간관계의 문제가 서로 잘 모르는 상태에서 발생하는 오해라고 생각한다. 자연도 마찬가지다. 겉보기에는 징그럽고 쓸모없어 보이는 곤충이나 나무도 알고 보면 사랑하고 아낄 만한 요소가 다 있다. 내 좌우명이자, 학문하는 이유고, 내 아이뿐 아니라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은 삶의 가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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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천 프로필

1954년 강원도 강릉 출생
 72년 서울 경복고 졸업
 77년 서울대 자연과학대 동물학 졸업
 82년 미국 펜실베이니아주립대 대학원 생태학 석사 학위 취득
 89년 미국 곤충학회 젊은과학자상 수상
 90년 미국 하버드대 대학원 생물학 박사 학위 취득
 90~92년 미국 하버드대 전임강사
 92~94년 미국 미시건대 교수
 94~2006년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
2000년 제1회 대한민국 과학문화상 수상
2006년~현재 이화여대 에코과학부 석좌교수
2007~2009년 한국생태학회 회장
2013년~현재 국립생태원 원장
2014년~현재 생물다양성과학기구(IPBES) 기술지원단장
2013년~현재 생물다양성협약(CBD) 대체의장

인생의 롤모델: 미국 프로 농구의 전설 줄리어스 어빙(Julius Erving). 코트에서 마치 한 마리 새처럼 날아다니는 그가 멋있다. 미국 대학에 있을 때 학생들이 나를 닥터 제이라고 불러주면 가산점이라도 줄 생각이었다. 닥터 제이(Dr. J)는 줄리어스 어빙의 별명이고 내 영어 이름도 제이(Jae)다. 훗날 아들이 “아빠가 흑인이었으면 난 NBA 선수가 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할 때 잠시 동안 ‘줄리어스 어빙으로 태어났으면’ 하고 꿈꾸기도 했다.

 내 인생을 바꾼 책: 자크 모노의 『우연과 필연』. 절망스러운 대학 생활 중에 발견한 이 책은 나에게 생물학자가 철학책을 쓸 수 있다는 희망을 줬다.

 좌우명: 알면 사랑한다. 스스로 만든 말을 좌우명으로 삼는 게 쑥스럽긴 하지만, 알아야 사랑할 수 있고 자연도 아낄 수 있다. 내가 학문을 하는 이유다.

글=전민희 기자 jeon.minhee@joongang.co.kr
사진=김경록 기자 kimkr8486@joongang.co.kr


[최고의 유산]
▶돈만 벌다 사라질 건가, 선한 빛을 남기고 갈 건가
▶장학 사업하며 행복하다던 아버지, 나눔이 최고의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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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한 목적의식을 가져라, 그래야 아침 일찍 눈도 떠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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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민희 기자skymini1710@joongang.co.kr
강남통신·열려라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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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록 기자kimkr8486@joongang.co.kr
강남통신·열려라공부 사진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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