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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유산] 장학 사업하며 행복하다던 아버지, 나눔이 최고의 가치

1 이 기사는 2016-04-06 오전 00:10:00 에 실린 기사입니다.

대 이어 장학 사업하는 송원그룹
고 김영환 전 회장과 김해련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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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3월 열린 송원김영환장학재단 설립 30주년 기념보은 행사에 참석한 아버지와 장학생들. 당시 아버지는 “지금이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의 아버지는 언젠가 돈을 많이 벌면 자신처럼 어려운 학생들을 돕겠다고 결심했다. 회사를 창업하고 성장 가도에 오르자 회사 자본금 두 배의 돈을 모아 장학회를 설립했다. 아버지는 딸에게 항상 사사로운 이익을 좇지 말고 남과 더불어 살라고 당부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사업을 이어받은 딸은 선친의 뜻을 이어 “나눔이 삶의 최고 가치”라고 말한다. 김해련(54) 송원그룹 회장과 고 김영환 송원그룹 전 회장의 이야기다. 


아버진 장학 사업하기 위해 회사 경영한 분
83년 회사 자본금 두 배인 1억으로 재단 열어
장학생들이 보낸 감사 편지를 가장 아껴


사업을 대단한 특권이라 생각 말라던 아버지
부모든 사업가든 약속 지키고 솔선수범해야
내 일에 최선 다하니 아이들도 성실하게 자라



인생의 가장 행복한 순간은 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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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련 회장


암 투병 중에도 “행복하다”고 말하던 사람. 김해련 송원그룹 회장은 아버지를 그렇게 기억한다.

 송원김영환장학재단 30주년 기념행사에서 아버지는 자신이 학비를 지원해준 수백 명의 장학생에게 둘러싸여 감사 인사를 받았다. 아버지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지금이 바로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고 했다. 암과 싸우는 사람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환한 얼굴이었다.

 송원그룹은 창업주이자 김 회장의 부친인 고 김영환 회장이 1975년 한국전열화학(현재 태경산업)을 인수한 것이 모태가 됐다. 석회석을 원료로 한 제강정련제를 국내 최초로 개발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외에 8개 계열사에서 합금철, 중질탄산칼슘 등을 생산하는 산업용 소재 기업이다. 일반 소비자에게 다소 생소하지만 설립 41년째, 매출 4000억원대의 중견 기업이다.
 
 김 회장의 기억 속 아버지는 무남독녀 외동딸을 지극히 아끼던 ‘딸 바보’였다. 팔삭둥이로 태어난 김 회장은 어린 시절 내내 병을 달고 살았다. 11세 때 어느 날 밤에는 이유를 알 수 없는 고열과 구토에 시달려 의식을 잃었다. 아버지는 딸을 둘러업고 온 동네를 뛰어다니며 병원을 찾았다. 몇 시간 만에 발견한 한 병원에서 겨우 문을 열어줘 딸은 응급 처치를 받고 목숨을 건졌다.

 “나중에 어머니께 들었는데 당시 아버지는 얼마나 마음이 급했던지 양말도 신지 않고 맨발로 저를 업고 뛰었대요. 외동딸이 잘못될까 봐 애가 타셨던 거죠”

 김 회장이 초등학생이던 때 아버지는 작은 합섬 회사에서 일했다. 새벽에 회사에 가서 한밤중에나 퇴근하니 아버지 얼굴 보기가 힘들었다. 경상도 출신으로 무뚝뚝했던 아버지는 다정한 애정 표현에는 서툴렀다. 하지만 업무차 좋은 음식점에라도 가면 꼭 음식을 따로 포장해 가져와 딸에게 주는 살뜰한 아버지였다. 회사 야유회가 있을 때면 꼭 딸을 데려가곤 했다.

 “제가 맛있는 걸 먹을 때면 얼마나 행복한 표정으로 절 보셨는지 몰라요. 허약하던 제가 건강해진 것도 아버지의 정성 덕분이었어요.”

 열심히 일해 30대에 최연소 이사로 승진했던 아버지는 김 회장이 12세가 되던 해 회사를 그만뒀다. “정도를 지켜야 한다”며 경영자에게 바른말을 하다가 퇴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퇴사한 아버지는 회사를 직접 경영하겠다 결심하고 39세였던 1974년 한국전열화학을 인수했다.

 
공장에서 먹고 자던 고학생의 꿈

“믿어지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아버지는 장학 사업을 하기 위해 회사를 경영한 분이었어요. 창업 3년 만에 회사 매출이 손익분기점을 넘자마자 사내장학금 제도를 운용하기 시작했습니다.”

 회사 직원 자녀라면 누구나 중학교부터 대학교까지 학비를 지원받았다. 직원이 장학금을 학비 외의 용도를 쓸 것을 염려해 자녀를 회사로 불러 손수 장학금을 건넸다. 그리고 6년 뒤인 83년 회사가 어느 정도 기반을 잡자 아버지는 줄곧 꿈꿔오던 장학회를 설립했다. 회사 자본금 5000만원의 2배인 1억원을 출연해 송원김영환장학재단을 세웠다. “창업한 지 9년째, 회사가 채 안정되지 않은 시기였어요. 기업의 사회환원 활동에 대한 인식도 낮았죠. 하지만 아버지는 자신의 어려웠던 학창시절을 돌아보며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을 돕는 걸 사명으로 생각했어요.”
 
 경남 김해 장유에서 9남매의 차남으로 태어난 아버지는 건강이 나빴던 형을 대신해 부모님과 누나, 동생들을 돌봐야 했다. 형의 투병이 길어지면서 병원비를 감당하느라 집안 형편도 어려워졌다. 공부를 잘해서 서울대 상과대학에 입학했지만 등록금이 없었다. 입주 가정교사를 하면 숙식을 해결하면서 돈을 벌 수 있었지만 등록금을 낼 정도의 돈은 마련할 수가 없었다. 결국 한 푼이라도 더 벌 수 있는 고된 공장 근무를 택했다. 낮에도 근무해야 해서 수업 듣기가 힘들었다. 친구들의 노트를 빌려 공부하고 시험 기간에만 출석해 간신히 졸업했다.

 “당시 아버지는 다른 걱정 없이 공부만 하는 게 소원이었다고 해요. 차비가 없어 서울역에서 서울대까지 걸어 다니거나 며칠 동안 건빵으로 끼니를 때운 적도 있었다고 하셨고요. 공장에서 숙식할 땐 너무 추워서 한방에서 자던 직원들을 부둥켜안고 잤대요. 그때 ‘나중에 돈을 많이 벌면 꼭 나 같은 고학생을 돕겠다’고 다짐하셨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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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련 회장이 태어난 지 100일 됐을 무렵 당시 살던 전라북도 익산 집에서 아버지와 찍은 사진. 8개월 만에 태어나 몸이 약한 외동딸을 아버지는 극진히 아꼈다.


 아버지의 장학사업에 대한 애착은 컸다. 딸의 눈에는 장학사업을 하기 위해 기업 경영을 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매년 장학회 기금 규모를 늘려 더 많은 학생을 지원해 나갔다. 1억원으로 출발한 기금은 현재 156억원으로 늘었다. 매해 85여 명의 학생들이 연 1000만원의 장학금을 받는다.

 사회 저명인사도 많이 배출했다. 이제는 사회에서 자리 잡은 장학생 선배들이 자발적으로 기금을 모아 후배 돕기에 나선다. 2013년 장학회 출신들이 자발적으로 설립 30주년 기념 보은행사를 열던 날 김 회장은 아이처럼 기뻐했다. 장학생 대표로 한 학생이 김용택 시인의 ‘참 좋은 당신’을 낭송하고 “저희도 누군가의 사랑의 불이 되어주겠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감격한 얼굴로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며 “장학회가 내 인생에 없었다면 삶의 비전이나 사업의 목표도 없었을 것”이라고 답했다.

 “아버지가 가장 아끼는 물건이 바로 장학생들의 감사편지예요. 한 자 한 자 꼼꼼히 읽고 정성껏 보관하셨죠. 아버지가 장학회를 통해 자신이 꿈꾸던 것들을 다 이뤘기 때문에 삶에 후회가 없다고 했어요. 그때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아버지의 회고록 제목을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했던 사람』이라고 지었죠.”

 
네가 잘할 수 있는 일을 택하라
 
김 회장은 사사로운 이익보다는 공익을 우선했던 아버지를 가장 존경한다. 학업을 마치고 아버지 같은 사업가가 되겠다고 결심한 것도 그 때문이다.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서 아버지께 제 결심을 이야기 했더니 근심 가득한 얼굴로 ‘지옥으로 가는 길처럼 어렵고 힘든 일이다. 그래도 하겠느냐’고 하시더군요. ‘그래도 하겠다’고 하니 ‘한번 시작한 사업은 브레이크 없는 기관차’라고 하셨어요.”

 김 회장은 미국 경영전문대학원에서 석사를 취득한 뒤 뉴욕패션기술대학교(FIT)에서 패션디자인을 전공했다. 29세 되던 해인 1989년, 귀국하자마자 여성복 브랜드 ‘아드리안느’를 만들었다.

 “백화점 바이어를 만나서 매장 좀 내게 해달라고 애걸복걸하며 돌아다녔는데 사람들이 물어봐요. 부잣집 외동딸이 왜 이러고 사냐고요. 아버지 말대로 정말 쉽지 않은 길이었죠.”

 김 회장의 첫 사업이었던 여성복 브랜드는 주요 백화점에 입점하며 100억원대 매출을 올렸다. 99년에는 벤처기업 ‘에이다임’을 설립했다. 광통신이 깔리며 인터넷 사용이 대중화되는 시대에 발맞춰 옷도 인터넷으로 팔아 보자는 발상이었다. 그렇게 만든 기업이 의류쇼핑몰 1세대 기업이라 할 수 있는 ‘패션플러스’다. 당시로서는 드물게 백화점 입점 브랜드 옷 위주로 판매했다. 잘 나갈 때는 연 매출 1000억원까지도 기록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상장이 차일피일 미뤄지면서 어려움을 겪었다.

 “아버지 도움을 받지 않고 창업하느라 벤처캐피탈에서 투자를 받았어요. 상장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그게 생각만큼 쉽지 않았습니다. 고금리 이자를 갚느라 제 지분을 매각하고도 모자라 개인 돈까지 끌어다 갚고서 12년 만에 회사를 떠났죠.”

 김 회장은 이 때 “세상에 공짜는 없다”던 아버지 가르침을 떠올리고 후회했다. 2006년 아버지가 암 판정을 받은 때부터 김 회장은 회사 회의에 참석하며 어깨너머로 경영을 배워왔다. 아버지의 건강이 계속 나빠지자 2012년부터는 송원그룹에 부회장으로 합류했다. 암과 싸우면서도 꿋꿋이 회사 일에 매진하시던 아버지는 2014년 1월 건강 악화로 병원에 입원했다. 김 회장은 일주일에 한 번 회의 참석을 제외하고는 병상에 머물며 아버지 곁을 지켰다. 다시 털고 일어나리라는 딸의 기대에도 불구하고 2014년 3월 21일 아버지는 81세의 나이로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임종을 맞았다.
 
 -각별한 부녀지간이라 슬픔이 깊었을 것 같다.

 “많이 힘들었다. 마음이 안정되지 않아 일부러 아버지 회고록을 썼다. 아버지에 대한 생각과 감정을 정리하고 기업에 대한 비전도 다시 세우는 계기가 됐다.”

 -회사 경영을 맡은 후 겪은 어려운 점은 뭐였나.

 “그전에도 회사 회의에는 자주 참여했기 때문에 실무 파악에는 어려움이 없었다. 아버지 생전에 부회장직을 수행할 때에는 내가 회사에 대해 속속들이 다 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회장으로서 일해보니 전에 보이지 않던 부분이 보이더라. 구성원들 간의 의사소통이 단절돼 있었다. 조직별로 정보가 차단되어 전체적인 현황 파악이 안 됐다. 그런 점을 바꾸고 싶어 나부터 임직원들과 허심탄회하게 소통하려고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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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남영전구 김포 공장 확장 준공식이 끝난 후 아버지와 담소를 나누는 김해련 회장. 무뚝뚝한 성격의 아버지도 딸 앞에서는 표정이 밝아지곤 했다.


 -회사 경영권을 물려주며 아버지가 특별히 당부한 이야기가 있나.

 “‘사업은 살아있는 식물과 같아서 조금만 그냥 놔둬도 시든다’고 강조하셨다. 끊임없이 변화해야 살아남는다는 의미였다. 기업 경영은 쉬운 일이 아니다. 걱정하고 고민할 일이 너무 많다. 주변에 짐을 나눠서 질 직원이 많아야 한다. 내가 모르는 해답을 직원이 알 수 있다. 아버지는 생전에 ‘믿지 못하는 사람은 쓰지 말고, 한 번 사람을 쓰면 100% 믿어라’라고 하셨다. 아버지는 또 경영자의 원칙으로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 ‘약속을 했으면 손해가 나더라도 지켜야 한다’는 걸 강조하셨다. 회장이 회사를 투명하게 경영해야 직원들도 애사심을 갖는다는 것이다. 실제로 아버지는 지인의 회사가 어려움에 부닥치자 주식을 많이 매입해서 도왔는데 그 회사 사정이 나아지면서 외국계 회사들이 지분을 비싼 가격에 사주겠다고 접근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 회사 회장이 원하는 가격에 다시 되팔았다. 아버지는 ‘충분한 차익을 얻은 데다 약속을 어기고 다른 회사에 팔면 송원의 신뢰를 파는 것’이라고 했다.”

 -아버지와 다른 자신만의 경영 스타일이 있다면.

 “좀 더 도전적이고 혁신적인 기업으로 바꾸려 한다. 그래서 2020년 ‘1·3·5·7’이라는 새 비전도 세웠다. 2020년까지 1조원 매출을 달성하고, 신규 사업에서 3000억원 매출 달성, 총 5개 상장 계열사, 세계 1위 품목 7개를 확보하자는 뜻이다. 최근 소재 생산 기업을 인수 합병하고 신재생에너지 사업에도 진출했다.”

 -사업 때문에 늘 바쁜 엄마였을 것 같은데 자녀들을 잘 이해해 줬나.

 “딸은 이제 대기업 입사 3년 차고, 아들은 송원그룹에 입사해 현재 단양공장에서 근무하고 있다. 아이들이 크는 동안 함께 살며 돌봐주신 이모님(도우미)이 있다. 30년을 같이 한 분이라 해외로 가는 가족여행까지고 모시고 다닐 정도로 가족 같은 분이다. 보통 가정에서 엄마가 챙겨야 하는 온갖 일들을 이모님이 다 해주셨다. 대신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아이들과 대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딸이 학창시절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이 있었는데 한 아이가 나쁜 행동을 하고 문제를 일으켜서 고민하더라. 사소해 보일 수도 있는 교우 문제지만 아이 입장에서는 심각한 문제기 때문에 시간을 들여 같이 고민했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인지 아이들이 크고 작은 문제를 자주 상담해오는 편이다. 진로에 관해서 고민할 때는 ‘네가 잘할 수 있는 일, 하면 행복해지는 일을 택하라’며 아이들의 의사를 최대한 존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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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온 가족이 모여 찍은 사진. 왼쪽 위부터 딸 안수진(29), 남편 안광호, 김해련 회장, 아들 안수경(31). 아래 어머니 양부남씨와 아버지 고 김영환 전 회장.


 -자녀들이 기억하는 할아버지의 모습은.

 “손주들이 기억하는 할아버지는 남 돕는 데는 큰돈을 써도 본인은 제대로 된 옷 한 벌이 없는 사람이었다. 손주들에게도 검소하게 생활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래서인지 아이들이 부잣집이라고 사치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또 ‘사업하는 게 대단한 금수저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는 이야기를 나와 손주들에게 자주 하셨다. 제조업은 생존을 위해 열심히 뛰어야 하는데 이걸 특권이라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평소 두 아이가 어떤 사람이 되기를 바랐는지.

 “사실 특별하게 바란 것은 없다. 성적을 잘 받아오라고 압박한 적도 없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인간으로서 할 일을 다 하고 하늘의 뜻을 기다린다)이라고 생각한다. 대신 ‘성실해야 한다’ ‘자기 일은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는 이야기는 자주 했다. 뭐든 부모가 솔선수범하는 게 중요하다. 나는 항상 내 일을 끝까지 해내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했다. 그래서인지 아이들도 크게 삐뚤어지거나 속을 썩인 적 없이 성실한 아이들로 자라줬다. 아이들에게는 언제나 고마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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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련 회장이 두 아이에게 보내는 편지. 아버지에 대한 추억을 회상하고, 이제는 사회인이 된 자녀들을 응원하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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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련 회장은

1962년 경상남도 김해 출생
84년 이화여대 경영학과 졸업
86년 뉴욕 페이스대학 경영학 석사(MBA)
88년 뉴욕주립대 패션기술대학교 패션디자인 학사 졸업
89~99년 아드리안느 대표
99~2012년 에이다임 대표
2006년~이화여대 경영학과 겸임교수
2012~2014년 송원그룹 부회장
2014년~ 송원그룹 회장

좌우명: 일일신우일신(日日新又日新)
인생을 바꾼 책: 장자, 명리학 등 동양철학서
존경하는 인물: 아버지

글=박미소 기자 smile83@joongang.co.kr 사진=김경록 기자 kimkr8486@joongang.co.kr

[최고의 유산]
▶나눔이 축복이라던 어머니, 세상 살리는 디자인하는 아들
▶서울대 나온다고 행복할까, 자녀에게 자유를 주세요

▶분명한 목적의식을 가져라, 그래야 아침 일찍 눈도 떠져
▶아이가 뛰는 인생, 부모가 대신 뛰겠다 나서지 마라
▶보아 엄마, 하지 마라 잔소리 대신 "맘껏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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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록 기자kimkr8486@joongang.co.kr
강남통신·열려라공부 사진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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