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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유산] 나눔이 축복이라던 어머니, 세상 살리는 디자인하는 아들

1 이 기사는 2016-03-30 오전 00:10:00 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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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 교수는 판매 전액을 기부하는 나눔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매년 240명의 저소득층 아이들을 지원하고 있다.


4대 디자인 어워드 석권 배상민 KAIST 교수

배상민(45) KAIST 산업공학과 교수가 지난해 레드닷 어워드에서 베스트 오브 베스트 상을 수상한 작품 ‘박스스쿨’은 이동식 컨테이너 교실이다. 소외된 지역 아이들에게 교육 기회를 주기 위한 작품이었다. 2008년 독일 IF, 미국 IDEA, 일본 굿디자인, 시카고 굿디자인 등을 모두 석권한 ‘러브팟’은 전기가 필요 없는 친환경 가습기였다. 세계 4대 디자인 어워드인 레드닷 어워드, IDEA, IF, 굿디자인어워드를 52차례 수상한 세계적 산업 디자이너 배상민. 그는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디자인한다. “소비를 끌어내는 디자인이 아니라, 세상을 살리는 디자인”을 하는 게 그의 일이다. 지난 17일 대전 KAIST에서 그를 만나 디자인의 원천에 대해 물었다. 


아들 석사 학위식 안 가고 암 환자 돌본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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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슨스 스쿨 재학 당시의 배 교수. 그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직접 잘라 파격적인 헤어스타일을 연출하곤 했다.


그가 최고의 디자인 학교인 미국 파슨스 스쿨 교수직을 버리고 2005년 돌연 한국행을 택했을 때 사람들은 미쳤다고 했다. 코카콜라, 코닥, 3M 같은 글로벌 기업과 작업하며 명성을 날리던 때였다.

“이상하게 종일 디자인을 하고 사람들 사이에서 즐겁게 지내는데도 집에 돌아오면 공허함이 몰려왔어요. 사람들이 최고의 디자인이라고 하고 세계적인 상을 받아도 그 공허함이 사라지지 않더군요. 지금 생각하면 맹목적인 성공에서 오는 갈증이었던 것 같아요.”

14년 만에 귀국하던 날 어머니 김진순(67)씨는 아들을 마중하기 위해 공항에 나오지 않았다. 호스피스 봉사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아들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아들이 파슨스에서 석사 학위를 받던 날도 어머니는 오지 않았다.

“어머니는 ‘너 석사 학위 받는 거랑 죽어가는 암 환자랑 누가 더 중요하니’라고 묻더군요. ‘암 환자요’라고 답했더니 ‘역시 내 아들 맞네’라고 하고는 전화를 끊었어요. 늑막염으로 복수가 차서 절대 안정을 취하라는 의사의 만류에도 호스피스 병동에 가신 어머니였으니까요.”

어머니는 25년째 매주 목요일과 일요일 호스피스 봉사를 한다. 단 한 번도 빼먹은적이 없다. 목요일은 종일, 일요일은 밤샘 봉사다. 죽어가는 환자를 간병하고, 함께하던 환자가 돌아가시면 염도 손수 한다. 돌아가신 이가 외롭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오랫동안 호스피스 봉사를 해왔지만 드러내놓기는 싫어하세요. 몇 년 전 딱 한 번 호스피스 전문 잡지에 인터뷰한 적이 있는데 그때 기사 말미에 ‘사랑하는 아들 상민아, 나는 너에게 좋은 집도 돈이 많은 통장도 줄 수는 없지만 호스피스라는 축복을 유산으로 남긴다’라고 쓰셨더군요.”

아버지도 어머니와 마찬가지였다. 배 교수의 어린 시절 아버지는 길 가다 노숙자를 보면 집에 데려와 며칠씩 재우곤 했다. “한 번은 노숙자 할머니가 내 방에서 안 나가겠다고 해서 실랑이가 벌어지기도 했죠.”

그러던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알 수 없는 손님들이 끝없이 찾아왔다. 한 중년 부인이 너무 울어서 모두 궁금해했는데 알고 보니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된 그 부인을 부인이 결혼할 때까지 아버지가 남몰래 도왔던 거였다. “그 이야기에 가족들 모두 ‘역시 우리 아버지’ 했지요. 나누고 돕는 건 우리 가족들에게 특별하지 않은 일상이었어요.”

 
남 시선 개의치 않아, 옷 지어 입는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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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IST에서 강의 중인 배 교수. 그는 2005년 KAIST 교수로 부임한 후 나눔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17일 만난 배 교수는 그가 직접 디자인한 검정 옷을 입고 있었다. 1995년 뉴욕 파슨스 재학 시절부터 그는 자신을 잘 표현할 수 있는 옷을 직접 제작해 입었고, 그것은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됐다. 한복 바지저고리를 그만의 시각으로 재해석한 의상을 입고 파티에 등장하면 어김없이 그날의 패셔니스타로 꼽혔다.

“당시에는 망건이라고 하는 작은 두건까지 쓰고 다녔어요. 보는 사람마다 어디서 샀느냐고 묻더군요. 자연스럽게 한복에 대해 설명하고 제 체형의 단점도 가릴 수 있었죠. 내 이름은 기억 못 해도 이 옷을 입은 저는 누구라도 기억하더라고요. 디자이너는 스스로가 하나의 브랜드가 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어린 시절부터 그는 남들과 다른 옷을 입었다. 한 살 위 누나의 옷을 물려받아 입어야 했으니 분홍색이나 노란색 블라우스, 레이스와 퍼프가 달린 티셔츠, 빨간 바지 등이 그가 입을 수 있는 옷의 전부였다. 그 시절 파란 옷을 입지 않는 초등학생 남자아이는 그뿐이었다. 학교에 가면 친구들에게 놀림 받기 일쑤였다.

“하루는 어머니께 파란색 남자 옷을 사달라고 했더니 ‘입지 마. 그거 하나를 소화를 못하네’ 하시더라고요. 그 말에 자존심이 상했죠. 그래서 다시 입었어요. 그때부터는 아이들이 놀리면 ‘나니까 이런 옷을 소화하는 거야. 너희는 입어도 안 어울려’라고 받아쳤지요. 그랬더니 아무도 안 놀리더군요.”

그는 스스로를 남의 시선을 별로 개의치 않는 사람이라고 했다. 어찌 보면 뻔뻔하고 거칠 것 없는 성격은 아버지를 닮았다.

해군 출신인 아버지는 전역 후 해운업을 했다. 80년대 초 전 세계를 누비며 사업을 벌였다. 아버지는 긴 곱슬머리에 수염을 휘날리며 선글라스와 바바리코트를 즐겼다. 80년대에 그런 차림의 남자는 항상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영동고등학교에 다닐 때였는데 아버지가 제 학년과 반을 모르는 채로 나를 만나러 온 거였어요. 아들을 찾을 수가 없던 아버지는 수위 아저씨에게 확성기랑 자전거를 빌려서 운동장을 돌면서 ‘상민아 아버지가 왔다’라고 외치기 시작하셨어요. 긴 머리 휘날리며 바바리코트 입고 선글라스 끼고 자전거 타는 아저씨를 상상해 보세요. 표현에 적극적이었고 남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는 분이셨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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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시절의 배 교수 가족. 왼쪽부터 어머니 김진순씨, 배교수, 한 살 위 누나, 아버지 배능한씨.



전기가 필요 없는 가습기 ‘러브팟’
 
부모님은 한 번도 공부하란 말을 한 적이 없었지만 그의 성적은 늘 상위권이었다. 하지만 장난이 심해서 하루도 혼나지 않고 넘어가는 날이 없었다. “혼나면 잘못했다고 하고 무서워하고 그러면서도 또 사고를 치고 그랬죠.”

고등학교 때까지는 별다른 꿈이 없었다. 그저 뭔가 표현하는 것에 대해 관심이 있는 정도였다. 그림을 그리거나, 춤을 추거나, 글을 쓰고, 말하는 일들을 즐겼다. 꿈이 뭐냐 물으면 발레리노라고 답했다. 대학은 영문과를 나왔다. “재수해서 음악이나 발레를 하겠다고 생각했는데 덜컥 영문과에 붙어버렸어요. 부모님은 ‘졸업만 하면 너 하고 싶은 거 해도 된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일단 등록을 했는데 정말 하기 싫은 거에요. 그래서 입대를 했죠.”

군대에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지 적어봤다. 그러기 위해선 부모님을 설득해야 했다. 그러자니 대학 졸업장이 필요했다. 그 길로 그는 학사 고시를 준비했다. 제대를 앞두고 영문학사 졸업증을 받았다. 말년 휴가에 우연히 미국 뉴욕 파슨스 학장이 조선호텔에서 학교 설명회를 연다는 소식을 들었다. “세계 1위 디자인 스쿨이라는 말에 호기심을 갖고 찾아갔더니 그간 내가 배우고 싶었던 표현하는 방법에 대한 모든 걸 가르치는 대학이더군요. 입학 과정을 문의하고 편지와 포트폴리오를 냈는데, 단번에 입학 허가증을 받았어요.”

뉴욕은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전 세계의 내로라하는 디자이너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고, 파티도 매일같이 열렸다. 14년간 한 번도 한국이 그립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하루하루가 즐거웠고 디자이너로서도 잘 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자신이 쓰레기를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업이 요구하는 아이디어는 ‘돈이 될 수 있는 것’이죠. 나 역시 사람들의 욕구를 자극해서 소비를 끌어 낼 수 있는 디자인, 환경이나 주변보다는 구매력 있는 소수를 위한 디자인을 하고 있더라고요. 돈을 좇는 ‘아름다운 쓰레기’를 만들고 있던 거죠.”

그즈음 오스트리아 출신 디자이너 빅터 파파넥의 『인간을 위한 디자인』이란 책을 읽고 욕망에 의한 디자인이 아닌 생명을 살리는 디자인을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다. 그 길로 한국행을 택했다.

“과학대학(KAIST)에 디자이너가 가겠다고 하니 사람들은 이상하게 생각했어요. 미래도 불투명했고요. 하지만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었어요. 내 재능을 나눌 수 있는 일, 세상의 아름다운 쓰레기가 아니라 세상을 살리는 디자인을 하는 사람이 되어야 했으니까요.”

KAIST 산업디자인학과 교수로 일하기 시작한 1년 뒤 배 교수는 월드비전으로부터 나눔을 목적으로 하는 제품의 디자인을 맡아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간의 갈증과 고민이 풀리는 순간이자 그의 첫 번째 나눔 프로젝트가 시작된 순간이었다.

세계 최초의 접이식 MP3 플레이어 ‘크로스큐브’, 친환경 가습기 ‘러브팟’, 빛의 밝기와 방향을 조절하는 조명 ‘딜라이트’ 등이 그렇게 탄생했다. 특히 크로스큐브는 2007년 세계적 디자인 어워드인 IDEA에서 은상을 수상해 큰 주목을 받았다. 2006년부터 그는 상품을 개발하고 제품을 판매해 전액 기부하는 나눔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며 현재까지 매년 240명의 저소득층 아이들에게 2000만원씩 지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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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 프로젝트 중 대표작으로 꼽히는 ‘박스스쿨(맨 위)’과 ‘러브팟’. 박스스쿨은 2015년 레드닷 어워드 베스트 오브 베스트를 수상한 이동식 컨테이너 스마트 교실이다. 친환경 가습기 러브팟은 독일 iF 프로덕트 어워드, 미국IDEA 어워드, 일본 굿 디자인, 시카고 굿 디자인, 미국 ID 매거진 애뉴얼 리뷰를 수상했다.


-나눔 프로젝트를 시작한 계기는.

“어머니를 따라 몇 번 호스피스 봉사를 가본 적이 있다. 그러나 그건 내가 할 수 없는 영역의 일이었다. 의사들도 포기한 암 환자를 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벅찼다. 그래서 내 재능으로 많은 사람을 도울 수 있고 어머니처럼 평생에 걸쳐 할 수 있는 걸 생각했다. 그래서 나눔 디자인을 시작하게 됐다. 방식만 다를 뿐 어머니가 원하는 나누는 삶이라는 방향과는 일치한다고 생각한다.”

-디자인 감각이나 창의성은 누구로부터 물려받았나.

“예술적인 감각은 어머니를 닮았고, 그것을 보는 눈은 아버지를 닮았다. 아버지는 뭐든 최고를 고집했다. 외국 출장길에 사 오는 선물은 언제나 최고급으로만 골랐다. 덕분에 집안에는 늘 당대 최고의 물건들이 있었다. 내 안목이 높아질 수 있었던 이유인 것 같다. 어머니는 알뜰하고 생활력이 강한 편이었다. 아버지는 매일 어머니에게 연애편지를 썼고, 항상 ‘사랑하는 순아’라고 부르셨다. 그런 표현력은 아버지를 닮은 것 같다.”

-자유분방한 성격인 것 같다.

“군인 출신인 아버지는 매일 아침 새벽 운동이 끝나면 예배를 드리고 누나와 나에게 하루 일과를 적으라고 했다. 그리고는 저녁에 그 하루 일과를 모두 지켰는지 반드시 확인했다. 어릴 땐 무척 불만이었다. 하지만 나중에 생각하니 나와 누나 모두 너무 외향적인 아이들이라 어느 정도 제제가 필요했던 것 같다. 우리끼리도 ‘부모님이 그렇게 엄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라는 말을 한다. 간섭이나 강요는 없었지만 생활 습관과 예의범절에 대해서만큼은 엄하셨다. 나 역시도 결혼해서 나 같은 아이가 태어난다면 부모님처럼 엄하게 키울 생각이다. 부모님의 엄한 교육이 없었다면 뉴욕의 화려한 생활에서 방탕하게 살았을 수 있다. 부모님의 교육 덕분에 자유를 누리면서도 방종하지 않을 수 있었다. 어떤 유혹 앞에서도 절제가 되더라. 굉장히 감사히 여기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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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 교수가 늘 지니고 다닌다는 어머니 김씨의 편지. 어머니는 1999년 미국에서 유학 중인 아들을 위해 이 편지를 썼다.


-아이디어를 어떻게 얻는지 궁금하다.

“뉴욕 파슨스에 가면서부터 나만의 노트를 썼다. 어떤 것을 볼 때, 느낄 때, 문제에 부닥칠 때 최소 5분씩 깊이 생각한다. 생각할 때는 반드시 노트에 적거나 그림을 그린다.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하는 생각도 꼭 한다. 나라면 이 공간을 어떻게 꾸몄을까, 나라면 저걸 어떻게 만들었을까 같은 생각이다. 디자이너는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이 아니라 문제를 창의적으로 해결하는 사람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만약에 나라면’이라는 질문을 던지는 게 중요하다. 사람들이 보기엔 그때그때 아이디어를 쏟아내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나에게는 20여 년에 걸친 고민이 그 순간에 터져 나오는 거다. 현재까지 20권 이상의 노트를 갖고 있다. 어떤 페이지를 펼쳐도 그때 어떤 고민을 했는지 기억할 수 있다. 어떻게 하면 인간이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는가에 대한 모든 고민이 그 안에 있다.”

-왜 나눔이 최고의 유산인가.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까지 할 수 있지’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부모님 모두 나눔을 실천했다. 단 한 번도 누구를 도와라, 어떤 삶을 살아라고는 말하지 않았지만 그런 부모님을 보고 자라면서 당연히 ‘나는 사회에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됐다. 그리고 그분들이 해온 일들을 자식으로 이어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어머니처럼 호스피스를 할 자신은 없다. 그러니 내 재능으로 할 수 있는 생명을 살리는 나눔 프로젝트를 계속해 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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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상민 교수는

1972년 부산광역시 출생
   85년 서울 청운초 졸업
   88년 청운중 졸업
   91년 영동고 졸업
   94년 미국 파슨스 스쿨 오브 디자인 입학
   98년 파슨스 스쿨 오브 디자인 졸업과 동시에 최연소 교수로 임용, 디자인 회사 ‘데스키’ 디자이너 겸 디자인 회사 ‘스마트 디자인’ 디자이너로 활동
2003년 파슨스 스쿨 오브 디자인 석사 학위 취득
2005년 KAIST 산업디자인학과 교수
2006년 KAIST ID+IM 디자인 랩 디렉터
2006년 대만국제디자인공모전 금상 등 수상 외 2건
2007년 레드닷 디자인 어워드 대상·최고상 외 2건
2008년 IDEA 어워드 은상(러브팟) 외 2건
2010년 굿 디자인 어워드 제품디자인 부문 지마크 외 1건
2011년 IF 디자인 어워드 외 6건
2012년 IDEA 어워드 상업산업제품디자인 부문 동상 외 6건
          서울대에서 ‘디자인과 테크놀로지’로 박사 학위 취득
2012년 IDEA 어워드 사회적영향 부문 콘셉트어워드 외 2건
2013년 굿 디자인 어워드 베스트 100(딜라이트) 외 1건
2014년 IF 디자인 어워드(스팀쿨러) 외 5건
2015년 레드닷 디자인 어워드 콘셉트 디자인 부문 대상(박스스쿨) 외 5건

대전=김소엽 기자 kim.soyub@joongang.co.kr

[최고의 유산]
▶서울대 나온다고 행복할까, 자녀에게 자유를 주세요

▶분명한 목적의식을 가져라, 그래야 아침 일찍 눈도 떠져
▶아이가 뛰는 인생, 부모가 대신 뛰겠다 나서지 마라
▶보아 엄마, 하지 마라 잔소리 대신 "맘껏 해라"

눈 먼 아버지가 도전할 때마다…아들은 한 걸음의 힘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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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엽 기자lum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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