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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역사] 일본 책 잔재를 넘어 한국 책 얼굴을 고민하다

1 이 기사는 2015-09-09 오전 00:05:00 에 실린 기사입니다.

1세대 북디자이너 정병규씨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린 ‘交,향’(한·일 국교정상화 50주년 기념 그래픽 디자인 기획전)에 마련된 정병규씨의 전시 부스. 정씨가 자신의 작품 앞에 서 있다.


TBC에 시국선언문 내보낸 고대신문 편집장
복학 어려워 홍상수 감독 모친의 문예지 맡아
6개월만 하려 했는데 평생 책 만들게 됐네요



일흔 살의 현역 북디자이너 정병규 ‘정병규출판디자인’ 대표는 민주화를 부르짖던 1970년대 푸르른 청년기를 보냈다. 그는 이 시기를 ‘문학의 시대’라고 부른다. 정 대표는 “전쟁과 독재, 가난과 궁핍의 시대를 살아내면서 세상을 향해 질문하고 답을 찾아가는 방법이 오로지 문학밖에 없었다”고 회상했다. 한때 소설가를 꿈꿨던 정 대표는 대학 학보사 기자, 출판사 편집장을 거쳐 북 디자이너가 됐다. 그에게 디자인은 소통의 방법이자 완성이었다. 그가 지금껏 옷 입혀 세상에 내놓은 책은 한수산의 『부초』를 시작으로 박경리의 『토지』, 황석영의『장길산』등 3000권이 넘는다. 지난 3일 그를 만난 국립현대미술관(서울 소격동)의 ‘한·일 국교정상화 50주년 기념 그래픽 디자인 기획전시-交, 향’에는 수많은 그의 작품이 전시돼 있었다. 그의 디자인을 따라 우리나라 출판의 역사를 읽을 수 있었다.


“아오, 날씨가” 서정주 선생의 다방 수업

대구에서 중·고교 시절을 보낸 정 대표는 소문난 문학소년이었다. 전국에서 소문난 수재만 모였다는 경북중·고교에서 성적은 늘 상위권이었고, 글깨나 쓰는 소년 문인들 사이에서도 이름이 높았다. 부모님은 명문대 법대에 진학하길 바랐지만, 문학에 눈을 뜬 소년은 오직 작가가 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책을 좋아했던 그는 교지를 만들었다. “교지는 단순한 학생 잡지가 아니었어요. 내 눈엔 학생들이 직접 글을 쓰고 책의 형태를 제작해 1년에 딱 한 권 나오는, ‘성스러운 매체’였다고나 할까요. 교지 제작에 참여하는 건 엄청난 영광이라고 생각했어요.” 어려서부터 눈썰미 좋고 손재주 남달랐던 정 대표는 그림도 곧잘 그렸다. “내 그림이 교지에 작게라도 실리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죠. 어쩌다 교지 표지를 장식하는 날이면 더할 나위 없이 영광이었고요.”

대학은 서라벌예대(※중앙대의 전신)로 진학했다. “작가가 되겠다고 하니 부모님은 ‘대책 없는 짓 한다’며 반대를 하셨지요. 동생(정재규 화백)이 부모님 몰래 나 대신 원서 써서 갖다 내버렸어요. 사실 경북고 졸업하고 서라벌예대 간 사람은 아마 내가 유일할 거야.”

그렇게 들어간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는 전국의 문학청년들이 총집합한 곳이었다. 미당 서정주 시인, 김동리 소설가가 강의하고, 학생들은 전국 각지에서 모인 문청들이라 학교 분위기는 기성 문단과 흡사했다. 정 대표는 이런 분위기에 쉽게 적응하지 못했다. “아마 나한테 공부에 대한 고정관념이 있었던 모양이에요. 수업 시간에 교재도 없고 강의도 없으니 영 불편했어요.”

수업은 이런 식이었다. “미당 선생이 수업에 들어오셔요. 날씨가 좀 우중충하다 싶으면, ‘아오, 이거 날씨가’라고 한마디 하시고 그냥 일어서는 거죠. 학교 앞 ‘밀리온’이라는 다방으로 학생들 데리고 가서 요즘 글 쓰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아이들이 글 써서 가져오면 죽 읽어보고 평가도 해주시는 거죠. 지금 생각하면 참 이상적인 수업인데, 나는 너무 제도권 속의 모범생이어서 적응을 못 했지.”

고대신문 1면에 ‘학생 석방하라’ 제목 내고 도피
 
박경리의 『가을에 온 여인』. 정 대표는 최근 “책마다 고유의 서체를 써야 한다”는 일책일자(一冊一字)의 원칙을 구현하기 위해 타이포그래피 작업에 전념하고 있다.
서라벌예대에서 휴학을 거듭하다 고려대 불문과로 다시 진학했다. 고려대에서는 학과 공부보다 신문 만들기에 열성이었다. “70년대 고대신문은 학생이 직접 창간해 운영하고, 학교는 후원해주는 형태였어요. 매주 화요일에 신문이 나오면 학생들이 이거 받아가려고 교환권 가지고 100m 이상 줄을 쫙 늘어선 게 보통이었다고.”

고대신문이 주목받았던 건 학생운동이 왕성하던 시대상과도 맞물린다. 학생뿐 아니라 대학생 동향을 궁금해하는 신문사와 방송국 기자들은 물론 정부에서도 대학신문을 예의주시했다. 정 대표가 고대신문 편집국장을 맡았을 때 민청학련 사건(※1974년 4월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을 중심으로 180명이 구속·기소된 사건)이 터졌다. 그는 신문 1면에 기사 대신 ‘구속 학생 석방하라’는 문구만 인쇄하고, 후배 기자들과 몸을 피했다. 전국대학신문협회라는 단체를 만들어 언론 자유를 주장하는 시국선언문을 녹음해 방송에 내보내기도 했다. “선언문을 녹음하고 저녁 뉴스에 내보내 준 방송국이 바로 동양방송(※JTBC의 전신)이었어요. 지금 중앙일보 건너편에 ‘시티즌’이라는 다방이 있었는데, 거기서 기자 만나 녹음하고 저녁 뉴스 시간에 방송되는 거 보고 수유리로 도망쳤죠.”

대학에서 신문을 만든 경험은 정 대표의 인생 줄기를 바꿔놨다. 글쓰기가 아닌 편집에 재능과 관심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글을 읽고 쓰는 것도 좋아하지만, 어떻게 하면 신문을 독자가 더 쉽게 읽을 수 있고 보기 좋게 만들 수 있을까에 대해 늘 고민했어요. 가로쓰기를 도입하고 사진 사용방법을 매뉴얼화 하기도 하고, 지면을 4면에서 8면으로 확장하는 등 다양한 편집 디자인의 혁신을 시도하면서 레이아웃의 세계에 빠져들었어요.”

이청춘 선생과 함께한 병아리 편집장 시절

민청학련 사건 이후 학교에 복귀하기 힘들어진 정 대표는 출판계에 몸담게 된다. “영화 만드는 홍상수 감독 어머니이신 고 전옥숙 여사가 그때 월간 ‘소설문예’라는 잡지를 창간하신다며 저더러 편집장을 맡아달라고 하셨어요. 6개월 정도 일하다 학교로 돌아가려 시작한 책 만드는 일이 오늘까지 이어졌네요.”

당시 소설문예의 창간 멤버는 편집장을 맡은 정 대표를 포함해, 편집주간은 소설가 고 이청준, 편집위원은 소설가 이제하·송영 등이었다. “문학의 시대였으니까요. 쟁쟁한 인물들이 다 출판계에 몰려 있었어요.”

전 여사가 정 대표를 편집장으로 점찍은 건 소설가 강호무의 입김 덕분이었다. “강호무 형은 ‘일본연구’라는 잡지의 책임을 맡고 있었는데, 대학에서 전공 공부 제쳐 두고 학교 간행물을 만들어온 내 경력을 과대평가하신 거죠. 덕분에 프로와 아마추어의 세계가 얼마나 다른지 절실히 경험하고 배울 수 있었어요.” 특히 고 이청준 선생은 사회 초년생인 정 대표를 불러 술잔을 기울여 가며 문단 이야기, 잡지를 꾸려가는 방법, 세상 돌아가는 일 등에 대해 세세하게 알려줬다. “이청준 선생은 그때 이미 사상계·아시아·지성 등 엄청난 잡지를 거쳤기에 그분이 들려주는 조언과 가르침이 이제 막 이 일을 시작한 나에게 얼마나 가슴 설레고 감사했는지 몰라요”라고 회상했다.

정 대표는 편집자가 갖춰야 할 소양으로 크게 세 가지를 꼽았다. 첫째가 오탈자를 잡아내는 교정교열과 문장을 다듬는 윤문 실력이다. 둘째는 어떤 글을 쓸 것인지 방향을 정하는 기획 능력, 세 번째가 책 전체의 콘텐트와 디자인의 조화와 흐름을 잡아가는 레이아웃 감각이다. 정 대표는 “70년대 편집자들은 레이아웃에 강했어요. 나도 그렇게 되고 싶었고요. 그게 바로 북디자인이었던 거죠.”


민음사 박맹호 지원으로 북디자인 영역 개척
77년 한수산의 『부초』 일본풍 표지 통념 날려
보기 좋지 않은 책은 독자에 대한 모독이죠


 
왼쪽부터 한수산의 『부초, 이청준의 『매잡이』, 박경리의 『토지』, 이윤기의 『어른의 학교』.


나를 알아준 리더, 박맹호 민음사 회장

그가 북디자이너로 명성을 떨친 건 민음사 박맹호 회장과의 만남이 결정적 계기였다. 정 대표의 능력을 알아본 박 회장은 그에게 민음사 책 디자인에 대한 전권을 맡겼다. 정 대표가 민음사에서 일한 10년 동안 박 회장은 한 번도 디자인 시안을 보여달라거나, 직접 디자인의 최종 결정을 한 적이 없다. “잘하든 못하든 나의 존재와 약간의 능력을 완전하게 믿어주는 리더와 일한다는 것, 디자이너로서 그만한 행복이 없었어요.”

편집자가 아닌 ‘디자이너 정병규’의 첫 작품은 77년 한수산의 『부초』였다. 파란색 표지에 한자로 쓴 제목과 저자명을 세로로 세운 책 표지는 당대의 책 표지에 대한 통념을 무너뜨린 ‘혁명적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요즘 사람들이 보면 ‘그런가 보다’ 하겠지만 온통 일본풍 디자인으로 천편일률적인 책 표지를 만들던 당시에는 혁명적이었죠.”

정 대표의 손을 거쳐 나온 두 번째 파격은 이청준의 『매잡이』였다. 작가 사진 한 장과 활자로만 표지를 디자인해서 이를 처음 본 독자들은 당혹스러워했다. 하지만 박 회장은 이 책을 부초와 함께 ‘책의 안목을 급격히 끌어 올린 두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이후 오늘의 작가 총서, 민음 문학시리즈 등은 독자들에게 “표지만 봐도 민음사 책인 걸 단박에 알 수 있다”는 호평을 받았다.

박 회장은 정 대표에게 “새로운 것을 마음껏 보고 배우고 오라”며 두 번의 외국행을 도왔다. 79년 일본 도쿄에서 열린 ‘유네스코 편집자 트레이닝 코스’에 참가한 정 대표는 큰 충격을 받았다. “외국은 북디자인이라는 분야가 완전히 전문화돼 사회적인 대접을 받고 있더라고요. 국내는 편집자가 디자이너를 겸하거나 디자이너가 편집자 아래 보조였는데 외국은 디자이너의 위상이 전혀 달랐어요. 이때 디자이너로 완벽하게 전업하기로 결단을 내렸죠.”

두 번째 외국행은 프랑스 유학이었다. 82~83년까지 2년간 파리에 있는 에스티엔느 학교에서 공부했다. 정 대표의 유학 비용은 물론, 한국에 남은 가족의 생활비까지 박맹호 민음사 회장을 포함해 열화당·문학과지성사 등 7곳의 출판사 대표들이 책임져줬다.

“아직도 일본식 디자인 남아 있어”
 
정 대표는 “우리나라 출판계에 일본식 디자인의 잔재가 너무 많다. 유럽 정통 북디자인의 시각에서 보면 구두 위에 양말을 신은 듯한 정통성 없는 북디자인이 남발되는 것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일본식 북디자인의 대표적인 예가 딱딱한 겉표지에 맨들맨들한 종이를 입힌 양장본 책의 디자인이다. 정 대표는 “일단 명칭부터 다 틀렸어요. 일본에서는 이 딱딱한 부분을 ‘표지’, 이를 감싸는 맨들맨들한 종이를 ‘커버’라 부르면서 양장본 자체는 ‘하드커버 책’이라고 하죠. 유럽에서는 딱딱한 부분이 ‘커버’고 이를 감싼 종이는 ‘자켓’이라 불러요. 본래의 명칭으로 바로잡아야 해요.”

자켓에 인쇄된 이미지를 커버에 똑같이 입히는 것도 북디자인의 정통 규범에 어긋난다. 커버에는 아무것도 인쇄하지 않거나, 자켓 이미지에서 가장 상징적인 것 하나만 따오는 게 정석이다. 정 대표가 책의 정통성과 규범에 민감한 이유는 “우리가 이렇게 정통성 없이 일본 디자인의 들러리를 서주다 보면, 일본은 자신들의 디자인이 ‘동양의 새로운 디자인 모범’이라는 억지 주장을 펼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규범을 지킨 책이란 독자들이 보기 좋아야 한다는 의미도 담고 있다. 그는 “규범 없이 만든 책은 독자에 대한 모욕이기도 하다”는 말도 했다. “제가 시력이 아주 나빠요. 아마 책이 큰 원인일 겁니다. 외국 책을 보면 글자가 검정으로 인쇄돼 선명하고 눈이 편합니다. 우리나라 책의 글자는 회색조로 인쇄해 흐리고 오래 읽다 보면 눈이 아프죠. 종이 질도 좋지 않아요. 펄프 함량이 낮고 횟가루를 많이 쓰니 뒤 비침 현상도 심하고 굉장히 무겁죠. 기본을 지키지 않은 이런 책이야말로 독자에 대한 무례고 모욕이죠.”

3000권이 넘는 그의 작품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책 표지로는 고 박완서의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를 꼽았다. “당시 대다수 책 표지가 원색 바탕에 제목은 큰 글씨로 강조하는 방식이었어요. 나는 그 소설의 내용을 다 읽었고, 박완서 선생이 그 소설을 쓴 이유(※90년에 출간된 이 작품은 작가 박완서가 88년 아들의 죽음 이후 심경을 고백한 일기 같은 책으로 알려졌다)까지 알았기에 트렌드에 맞춘 강렬한 디자인은 내놓을 수가 없었죠. 단색 바탕에 작은 글씨를 썼습니다. 잔잔하게 간 파격이었지요. 영업팀에서는 시장조사 결과를 들이밀며 제목 활자를 키워달라고 했지만, 끝까지 제 고집을 밀어붙였죠. 결국 이 책은 베스트셀러가 됐습니다.”

정 대표는 현재 ‘책의 기본’을 알리기 위해 후학을 양성하는 데 힘을 쏟고 있다. 84년부터 국내 최초의 편집기획과 디자인 전문회사인 정디자인실(현재 정병규출판디자인)을 설립해 북디자인을 알렸고, 97년부터는 홍익대 미대 시각디자인학과 겸직교수로 강단에 서기도 했다.

그는 북디자이너는 편집자의 지시에 따라 책의 모습을 예쁘게 꾸미는 역할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북디자이너는 책의 내용과 현재의 트렌드를 종합적으로 이해하고 디자인적 역량을 동시에 갖춘 전문가여야죠. 이런 후배를 길러내고 출판 업계에서 북디자이너들이 제대로 자리매김할 수 있게 돕는 것이 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글=박형수 기자 hspark97@joongang.co.kr
사진=김경록 기자 kimkr8486@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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