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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역사] 상처투성이 삶 딛고 세계대회 우승 … “비보이는 스스로 피어난 꽃이다”

1 이 기사는 2015-08-26 오전 00:05:00 에 실린 기사입니다.

세계 정상급 춤꾼 ‘스네이크’ 하휘동
 
하휘동이 팔꿈치로 땅을 딛고 거꾸로 서는 ‘프리즈’ 동작을 선보이고 있다.


하휘동(36)은 세계 정상급 비보이다. 2001년 처음 출전한 세계대회 독일 ‘배틀 오브 더 이어’에서 ‘베스트 쇼’ 상을 받은 이래 영국·일본·오스트리아·태국 등에서 열린 비보이 세계대회를 모두 석권했다. 2002년 ‘UK 비보이 챔피언십’, 2005년 스웨덴 ‘타임 투 배틀’, 2006년 프랑스 ‘배틀 드 마시’, 2008년 태국 ‘배틀 오브 더 이어 아시아’와 오스트리아 ‘도요비 배틀’, 2009년 일본 ‘수퍼 챔플’과 한국 ‘사이언 비보이 챔피언십’ 등에서 세계 비보이들과 겨뤄 모두 우승했다. 불우했던 어린 시절, 춤은 그의 모든 것이었다. 초등학교 때 ‘뉴 키즈 온 더 블록’의 춤을 보고 반했고, 중학교 땐 TV에서 본 ‘서태지와 아이들’ 멤버 이주노의 헤드 스핀을 따라 했다. 춤꾼으로는 상당한 나이인 30대 중반이지만 여전히 그는 춤을 춘다. 팬들은 그의 공연장을 찾아 환호한다. 지난해부터는 세종대 실용무용학과 특별교수로 자신처럼 춤 좋아하는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한국 비보이의 역사를 쓴 하휘동을 만났다.


90년대 춤 가르쳐 주는 곳이 따로 없었어요
댄스 간판 보고 가니 사교댄스 학원인 적도
무작정 안무가 찾아, 팝핀현준과 ‘고릴라’팀



‘스스로 피어나는 꽃’. 하휘동은 비보이를 이렇게 정의했다. 클래식한 춤이나 음악은 정해진 룰이나 기술이 있지만 비보이는 모든 걸 스스로 창조해 나간다는 의미다.

“춤은 꽃이에요. 꽃처럼 아름답죠. 그 아름다운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엄청난 기술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건 클래식 무용도 마찬가지겠죠. 하지만 비보잉에는 아무것도 정해진 게 없어요. 춤추는 사람 스스로 모든 걸 개척해 나가야 해요.”

그의 말처럼 비보이 하휘동의 인생은 스스로 피어난 꽃을 닮았다.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부모님이 이혼했고 두 살 어린 여동생과 친척집을 전전했다. 초등학교 4학년부터는 할아버지, 아버지, 여동생과 함께 살았다.

그는 눈에 띄지 않는 조용한 성격의 학생이었다. 공부에는 흥미가 없었다. 공부하라고 잔소리하는 선생님도 없었다. 하지만 축제 땐 춤으로 이름을 날렸다.

“학교 복도에서, 체육관에서 혼자 춤 연습을 하곤 했어요. 춤을 배우고 싶었지만 가르쳐주는 곳이 없었죠. 버스를 타고 가다가 ‘댄스’라고 써 있는 간판을 보고 내려서 찾아간 적도 있었는데 사교댄스 가르치는 곳이었어요. 왜 내가 원하는 걸 배울 수 있는 곳이 없을까 했죠.”

처음엔 2주 내내 물구나무서기만
 
2005년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한 비보이 대회 팜플릿에 홍보 모델로 나온 하휘동. 
춤이 너무 추고 싶어서 고2 때 나이를 속이고 나이트클럽 DJ를 했다. 이태원 ‘문나이트’라는 클럽이었다. 서태지와 아이들, 룰라, 듀스 등 가수와 댄서들이 춤을 추고 놀던 곳이었다. 새벽 5시가 되면 춤추던 사람들이 둥그렇게 원을 그리고 그 원 안에서 댄스 실력을 겨루곤 했다.

고3 여름 때 한 무명가수의 백댄서로 일하기 시작했다. 거기서 안무를 담당했던 비보이 이우성을 만났다.

“무작정 찾아가 ‘나인틴’(한 손으로 땅을 지탱하고 몸을 회전하는 동작)부터 시작했어요. 일단 물구나무서기부터 했어요. 벽에 대고 물구나무서기만 2주 동안 했어요. 아는 사람도 없고 말 걸어 주는 사람도 없고, 그냥 하루 종일 물구나무를 섰어요. 그러고 나니 함께 일하자 하더군요.”

서태지와 아이들의 이주노가 창단한 팀 ‘고릴라’에서 춤을 추게 됐다. 팝핀현준은 팝핀을, 고 전나마는 힙합을, 하휘동과 이우재, 한상민은 비보잉을 했다. 비보잉은 신체의 원심력을 활용해 다리 등 몸의 일부분을 회전시키거나(파워무브), 음악의 리듬에 맞춰 땅 위에서 발을 구르는 동작(스타일 무브)을 말한다. 비보잉과 함께 대표적인 스트리트 댄스로 꼽히는 팝핀은 근육에 순간적으로 힘을 줘 움직임을 딱딱 끊어주는 춤이다.

인터넷이 없던 시절이라 비디오테이프를 보면서 춤을 연구했다. 그러다 독일 ‘배틀 오브 더 이어’라는 세계대회를 알게 됐다. 대회 측에 참가 신청 e메일을 보내니 한국 대표팀이어야 한다고 했다. 비보잉 예선전을 위해 팀 8개가 모였고 거기서 우승해 2001년 한국 대표팀 자격으로 대회에 참가했다. 한국 최초의 비보이 대회 참가자였다. 전 세계에서 30개 팀이 참가했는데 현재 그가 단장으로 있던 ‘비주얼 쇼크’가 베스트 쇼상을 수상했다.

2002년에는 영국대회에 나가 우승을 했다. 한국 최초의 세계대회 우승이었다. 그 후 하휘동은 매년 세계대회에서 우승 행진을 이어갔다.

쿵푸·카포에라 등 무술과 춤의 접목
 
‘서태지와 아이들’의 이주노가 창단하고, 고 전나마, 팝핀현준 등이 활동한 힙합댄스팀 ‘고릴라 크루’의 브로슈어.
그의 별명은 ‘스네이크’다. 동작이 뱀처럼 유연하고 부드럽다고 해서 외국 댄서들이 불여준 별명이다. 그는 자신의 춤에 대해 ‘단점을 장점으로 만든 것’이라고 평했다.

“헐렁헐렁하고 유연한, 나만의 느낌을 잘 살리는 편이에요. 내가 잘할 수 있는 동작은 더 발전시키고 하기 어려운 춤의 비중은 줄여요. 선택과 집중을 하는 거죠. 물론 남들이 하는 기술을 어느 정도는 할 수 있어야죠. 기본은 할 수 있어야 특화도 할 수 있는 거니까요.”

자신만의 동작을 만드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는 자신이 보는 모든 것을 통해 춤 동작을 연구한다. 예를 들어 돌아가는 팽이를 보면서 이걸 어떻게 춤에 응용할까 궁리하는 것이다. 그는 중국의 쿵푸, 브라질의 카포에라 등 해외 전통무술의 화려한 테크닉을 춤에 응용했고, 기계체조의 동작을 춤에 활용하기도 한다.

“기술을 고안해 내고 이걸 연마해서 이뤄냈을 때의 성취감은 이루 말로 할 수 없을 만큼 커요. 비보잉의 가장 큰 매력이라고 생각해요.”

끊임없이 자신을 연마하면서 세계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둬온 그지만 춤을 출 땐 결과에 연연하지 않는다. 결과에 연연하지 않는 건 그의 생활신조다.

“대가를 너무 바라면서 노력을 하면 안 돼요. 나중에 오는 상처를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말이에요. 결과는 내 뜻대로 안 되기 때문에 즐기면서 하는 게 중요하죠.”

2008년 세계대회인 ‘배틀 오브 더 이어’에 나갔던 이야기를 전했다. 러시아 비보이팀과의 대결이 벌어졌는데 하휘동이 속한 한국팀은 ‘이겼다’ 했고, 러시아팀은 ‘졌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심사위원들은 러시아팀의 손을 들어줬다. 상대팀마저 놀랐던, 예상 못했던 결과였지만 받아들였다. “심사위원의 성향에 따라 결과가 바뀔 수 있어요. 기술을 중시하는 심사위원도 있고 음악과 춤을 중시하는 심사위원도 있는 거죠. 누구나 자신만의 스타일이 있는 거니까요. 출전하는 팀도 마찬가지고요.”


세계대회 석권보다 ‘댄싱9’ 방송으로 유명세
지금은 무용과 교수지만 한때 전단 돌려 생계
“개척할 게 많은 댄스 분야, 나만의 길 찾아야”


 


서른 중반에 ‘댄싱9’ MVP

세계대회를 제패했지만 그걸 알아주는 사람이 적다는 것도 받아들여야 했다. .

“2002년 처음 영국대회에서 우승하고 나서 정말 세상을 다 가진 줄 알았어요. 대회에서 태극기 세리머니도 했는데…. 사람들이 우릴 알아봐 줄 거로 생각했지만 아니었죠. 그땐 정말 힘들었어요. 그래도 요즘은 미디어가 발달하면서 인식도 많이 바뀌었죠.”

2013년에는 댄스 경연대회 ‘댄싱9’에 출전하면서부터는 그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훨씬 많아졌다. 국내의 내로라하는 춤꾼이 모두 나오는 프로그램에서 그는 다시 MVP를 했다. “사실 내 나이면 심사위원 쪽이 어울렸겠지만 댄서로서의 나를 시험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어요. 후배 댄서와 가수가 심사위원인 자리에 내 춤은 어떤 평가를 받게 될까, 그 긴장을 이겨내는 건 또 다른 도전이겠다 했지요.”

비보잉을 시작한 이래 그는 쉬지 않고 춤을 췄다. 개인 단독공연도 하고 팀을 결성해 팀 공연도 한다. 지난 주말까지는 ‘비주얼 쇼크’라는 팀으로 댄스 공연을 했다. 그전에는 현대무용, 스트리트 댄싱, 발레를 하는 최수진, 손병현, 윤전일, 정혜민 등과 함께 ‘더 시크릿’이라는 퓨전 춤 공연도 했다. 오는 9월엔 한국 무용하는 김주빈과 조그맣게 뭔가를 해보자고 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생계를 위해 광고 전단을 돌린 적이 있어요. 스쿼시 학원 전단이었는데 어쩌다 춤 이야기가 나와 제가 춤을 보여줬더니, 한 사람이 ‘이런 거 할 분이 아니신 것 같다’ 하더군요. 그 길로 나와 지금까지 춤만 췄어요.”

평생 춤을 춰온 그는 지난해 세종대 실용무용과 특별교수가 됐다. “이제는 춤을 배울 수 있는 환경이 좋아진 것 같아요. 할 수 있는 일도 많아졌고요, 비보이의 춤을 좋아해 주는 사람도 많이 늘어난 것 같아 기뻐요.”

“영어 공부만큼은 좀 해둘 걸”

지나간 학창시절, 공부에 대한 미련은 없지만 영어 공부만큼은 좀 해둘 걸 그랬다는 생각을 한다.

“중고등학교 때 아버지께서 다른 공부는 안 해도 되니 영어 공부만 하라고 하셨어요. 그런데 안 했죠. 외국 나갈 일이 뭐 있겠나 하구요. 그런데 외국 나갈 일이 너무 많아요. 학교 때 영어 공부만 좀 더 해뒀으면 외국 비보이들이랑 친하게 지낼 수 있었을 텐데 생각해요.”

그래도 후회는 안 한다. 아버지는 그가 공부하고 취직해서 자신처럼 건축 일을 하길 바랐다. 하지만 그는 춤을 추길 잘했다고 생각한다. “나는 지금으로도 만족하니까요. 재밌게 살고 있으니까요.”

댄서를 꿈꾸는 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을 물었다. 그는 ‘나만의 길을 찾으라’고 했다.

“아직은 댄서를 장기적으로 할 수 있는 직업이라고 하기엔 어렵다”는 그는 “스트리트 댄스를 공부해서 관련 학과 교수를 하거나, 외국 무용단에 들어가거나, 무용단에 들어가 댄서를 거쳐 무용단장이 되거나 등 자기만의 계획이 있으면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방향은 잡기 나름이고 정말 춤을 즐겨서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르면 그땐 선택할 수 있다고도 했다.

그의 관심은 춤을 계속 추는 거다. 교수든 안무가든 상관없다.

“나이가 들어서 지금보다 더 어려운 기술을 구사할 수 없게 되는 날이 올 거라는 생각도 합니다. 중요한 건 제가 오랫동안 즐기면서 춤출 수 있는 거죠.”

비보잉에 대한 인식이 과거보다 나아졌지만 현실은 아직 그리 녹록지 않다. 기업체의 후원을 받기도 쉽지 않고, 공공기관의 지원도 없고, 사람들의 인식이 나아지긴 했지만 대단한 정도는 아니다.

“아직은 비보이들끼리 팀을 만들어 연습하고 대회를 나가고 우승을 해야 인정받을 수 있는 상황이에요. 자기와의 싸움이 중요한 분야죠. 스스로 개척해 나가야 할 것들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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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조진형 기자 enish@joongang.co.kr
사진=김경록 기자 kimkr8486@joongang.co.kr 

조진형 기자enish@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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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록 기자kimkr8486@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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