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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역사] “어깨너머 몰래 배우는 설움은 그만” 미래의 제과명장 키우는 명장

1 이 기사는 2015-08-19 오전 02:30:00 에 실린 기사입니다.

권상범 리치몬드 제과기술학원 원장
 


열일곱 살에 처음 단팥빵을 먹으며 그는 생각했다. ‘세상에 이렇게 맛있는 게 있다니’. 그로부터 50여 년 동안 빵을 만들었다. 올해 일흔 살이 된 권상범 대한민국 제과명장, ‘리치몬드제과기술학원’ 원장 얘기다. 그는 요즘도 매일 새벽 ‘리치몬드 과자점’으로 가서 빵을 살핀다. 79년 문을 연 그의 빵집 리치몬드 과자점은 지금까지 36년 동안 명성을 유지해왔다. 리치몬드는 스위스 리치몬드 국립제과학교에서 따온 이름이다. 세계 최고 제과학교 이름처럼 세계 최고의 빵과 과자를 만들겠다는 다짐이었다.


“세상에 이렇게 맛있는 게 있다니” 빵과 첫 인연
화덕 옆 새우잠 자며 빵 공장 허드렛일부터 시작
나폴레옹 제과점을 ‘제빵 사관학교’로 키워



중학교 원서를 낸 아들에게 어머니는 “돈이 없는데 어쩌면 좋겠냐”고 물었다.

“어머니, 괜찮아요. 공부한 사람만큼 살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어린 권상범은 의젓했다. 다섯 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삯바느질로 생계를 꾸리는 어머니를 도와 가장 역할을 하던 그였다. 어려운 집안 사정을 알면서 학업을 고집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배우는 걸 좋아했고, 친구들처럼 학교에 가고 싶었지만 ‘나중에 독학하면 된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산에 가서 나무 땔감을 해오는 등 집안 궂은일을 도맡았다.

열일곱 살에 가족과 함께 외갓집이 있는 경북 의성으로 갔다. 외숙모가 운영하는 작은 다과점에서 빵을 처음 봤다. “앙꼬빵(단팥빵)을 태어나서 처음 먹었는데 이렇게 맛있는 게 세상에 있다는 생각에 놀랐어요.”

숙모의 다과점에서 빵 만드는 걸 배웠다. 숙모는 빵 기술자로부터 만드는 방법을 배워서 몇 가지 빵을 만들어 팔았다. “본격적으로 빵 만드는 걸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의성을 떠나 대구로 갔죠.”

대구 광월당제과점에 들어갔다. 광월당제과점은 서울에서 공장장(※당시엔 빵 만드는 곳을 공장으로 부르고 책임자를 공장장이라고 부름)을 데려와 그 밑에 서너 명의 직원을 두고 빵을 만들었다. 그곳에서 꼬박 1년을 일했다.

열아홉 살이던 63년 서울로 향했다. 더 좋은 빵을 만들고 싶었다. 종로5가에 있던 성림제과에 취직했다. 숙소가 따로 없어 밤이면 빵 굽는 화덕 옆에서 잠을 청했다. 하지만 고된 일보다 공장장의 거친 말투를 참기 힘들었다. 2년 가까이 일하다 그만뒀다. 65년 2월은 여느 겨울보다 추웠다. 보름간 노숙 끝에 풍년제과에서 허드렛일 하는 자리를 찾았다.

풍년제과서 인생의 스승을 만나다
 
풍년제과 근무(1965~72년) 당시 권상범(왼쪽) 명장. 풍년제과는 당시 신식 제과제빵 기계들을 갖추고 있었다.
옛 광교 조흥은행(현 신한은행) 앞에 있던 풍년제과는 당시 서울에서 손꼽히는 빵집이었다.

“엄청나게 좋은 제빵제과 기구와 시설을 보고 깜짝 놀랐어요. 무슨 일이 있어도 기술을 다 배울 때까지 버티겠다고 결심했어요.”

처음엔 행주 빨고 청소하는 허드렛일만 했다. 그러다 보름도 안 돼 슈크림과 단팥 끓이는 일을 맡았다. 반죽의 묽기가 일정하지 않아 늘 혼나는 선배들과 달리 그는 정확하게 재료를 계량해 일정한 묽기의 크림을 만들어냈다. 꾸준히 노력하며 한 단계씩 올라섰다. 공장장이 바뀔 때마다 공장장이 데려온 사람을 그의 윗자리에 앉히는 바람에 번번이 허드렛일을 하는 위치로 내려앉곤 했지만, 불평하지 않았다.

“저는 일할 때 최선을 다했고, 그래서 자신이 있었어요. 한 달만 지나면 다시 나를 인정해 줄 거라는 자신감이요.”

그리고 얼마 후 새로 공장장으로 온 ‘스승’ 김충복씨를 만났다. 60년대 일본에 가서 배웠던 김씨는 빵 반죽부터 공예과자까지 못하는 게 없었다. 일본 양과자전시회에 출전해 최우수상을 탈 만큼 경력도 화려했다. 권 명장은 그를 스승님이라고 부르며 따랐다. 롤케이크, 파운드·스펀지 케이크, 카스텔라 등 많은 빵을 배우고 함께 만들었다. 특히 크리스마스엔 불티나게 팔려나가는 케이크를 만드느라 눈코 뜰새 없이 바빴다.

그렇게 5년을 김씨 밑에서 배웠다. 그의 후배들이 다른 빵집을 운영하는 지역 공장장이 돼서 빵집을 떠나도 그는 스승 밑에 있겠다고 고집했다. “그때 제 월급이 2만원이었는데 먼저 공장장으로 간 후배들은 4만원 받는다며 찾아와 거드름을 피우곤 했어요. 그래도 전 제대로 준비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제대로 된 준비 없이 시작해서는 오래갈 수 없으니까요.”

그리던 어느 날 스승이 그를 불러 삼선교 빵집과 광화문 빵집 두 곳에서 공장장을 찾는데 어디로 갈 건지 물었다. “제가 책임자로 나가도 되겠습니까”라는 제자의 질문에 스승은 “된다”고 격려했다.

일본 유학 땐 제빵사들 맥주 사주며 비법 배워

72년 10월, 그는 나폴레옹 제과점 7대 공장장이 됐다. 그보다 앞서 2년 동안 가게를 거쳐간 공장장만 6명이었다. 그만큼 까다롭고 어려운 자리였다. 아무리 어려운 일도 그는 척척 해냈다.

그를 눈여겨보던 당시 나폴레옹 제과점의 고 강인정 사장이 학비와 체류비를 모두 지원해주겠다며 일본 유학을 다녀오라고 했다.

“지금도 잘하는데 일본 가서 공부하면 더 잘할 거 같으니 준비하라고 하셨어요. 조건이 뭐냐 물으니 유학에서 돌아온 바로 다음 날 그만둬도 된다, 아무 조건 없다고 하시더군요.”

75년 2월 일본 동경제과학교에 입학했다.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했다. 밤낮으로 이어지는 수업을 모두 들었다. 수업이 없는 날이면 도쿄 시내 빵집이란 빵집은 모두 찾아가 맛을 봤다.

“누구에게나 시간은 가장 큰 자산이에요. 시간을 아낄 줄 알아야 돈이 들어와요. 시간을 쪼개 배웠어요. 강 사장님이 자비로 보내주셨으니 전 하나라도 더 배워야 했어요.”

일본 빵집에 실습도 많이 나갔다. 실습 중엔 일본인 제빵사들에게 맥주를 사주며 친해지려 애썼고, 친해진 일본인들은 “권상, 뭘 알려줄까”라고 먼저 물어왔다.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후 약 4년 동안 나폴레옹 제과점에서 일했다. 많은 후배를 길러냈다. 나폴레옹 제과점이 제과제빵 사관학교로 알려진 데는 그의 역할이 컸다. 제과명장 김영모·서정웅씨도 그의 밑에서 일했다.


스위스 제과학교 이름 딴 리치몬드서 후배 양성
한국 3번째 제과명장 … 제빵사 인정받아 뿌듯
기술보다 정성이 중요해, 70세에도 매일 가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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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리치몬드 밤식빵·슈크림빵 대박

권 명장은 79년 가을 나폴레옹 제과점에서 독립했다. 당시 마포경찰서 옆에 빵집을 차렸다. 가게 이름은 강인정 사장의 요청에 따라 ‘나폴레옹 제과점’으로 했다.

문을 열고 6개월은 고전했다. 봉천동 집에서 오전 5시면 나와 버스를 타고 출근했다. 아내도 도시락을 싸들고 남편을 따랐다. “아내가 도와줘서 일할 수 있었죠. 애들 어린 시절엔 일하느라 함께 여행도 제대로 못 했어요.”

크리스마스가 지나고 다음 해부터 손님들이 제법 찾아왔다. 빵 맛으로 입소문이 난 데다 그날 팔고 남은 빵을 가게 앞 경찰 초소에 갖다 줬더니 ‘그날 만든 빵만 파는 정직한 가게’라고 알려졌다. 그날 만든 빵을 그날만 파는 건 지금도 한결같이 지켜온 권 명장의 원칙이다.

3년쯤 지난 어느 날 도로 확장을 한다며 가게를 비우라고 했다. 그때 눈에 들어온 곳이 동교동 홍대 앞이었다. ‘리치몬드’라는 이름을 알린 그 가게다. 83년 홍대 앞으로 이전하고 이듬해 이름도 나폴레옹 제과점에서 리치몬드 과자점으로 바꿨다. 리치몬드는 그가 유럽 연수 당시 다녀온 리치몬드 국립제과학교에서 땄다. 이왕이면 세계 최고의 이름을 붙여야 자신도 세계 최고가 될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먹거리가 드물던 80년대 빵의 인기는 대단했다. 그는 다른 곳보다 앞서 새로운 빵을 선보이곤 했다.

“손님이 찾을 때 만들면 늦어요. 미리 외국을 다니며 보고 연구했죠.”

80년대 그가 소개한 밤식빵과 슈크림빵은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요즘도 매장에서 제일 잘나가는 빵이죠. 특히 슈크림빵은 일본에서 배워왔는데 다른 집처럼 빵이 바삭하지 않고 부드러워 사람들이 좋아했어요.”

30년 홍대점 문 닫던 날 복장 차려입고 일일이 인사
 
권상범 명장은 다른 국가에도 제과제빵 기술을 전수하고 있다. 사진은 99년 러시아에 기술을 전수하는 모습.
93년 그는 오랜 꿈을 이뤘다. 리치몬드 제과기술학원을 연 것이다. 어린 시절 처음 빵 만드는 걸 배우며 다짐한 꿈이었다.

“스승님을 만나기 전 대부분의 빵 공장장들은 빵 배합 비율을 혼자만 알려고 안 가르쳐 줬어요. 후배들 몰래 빵을 만드는 사람도 있었죠. 어깨너머로 배워야 했는데 쉽지 않았어요. 그때 결심했죠. 언젠가 내 건물을 짓고 그곳에서 후배들에게 빵 만드는 법을 가르쳐주는 공부방을 열겠다고요.”

학원 문을 연 첫해 200명이 그의 학원에서 빵 만드는 걸 배웠다. 당시 학생 중엔 20~30대가 많았다. 하지만 97년 외환위기(IMF) 이후 40대의 비중이 높아졌다. 최근 빵에 대한 인기가 높아지면서 2010년 이후엔 다시 20대 학생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나이 들어 빵 만드는 걸 시작하면 힘들어요. 손마디가 굳어서 배우기 어렵죠. 중고등학교 졸업하고 입문하는 게 가장 좋아요. 손으로 하는 일은 어릴 때 시작할수록 좋아요.”

2002년 그는 대한민국 제과명장에 선정됐다. 서류 심사부터 실기까지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 국내 3번째로 제과명장의 영광을 안았다. “천직이라고 여긴 일을 할 수 있는 것만 해도 좋은데 나라에서 인정까지 해주니 그 기쁨을 이루 말할 수가 없었죠. 또 빵 만드는 사람을 인정해주는 시대가 왔다는 점도 뿌듯했어요.” 그의 조리복엔 명장임을 알리는 문양과 태극기가 수놓아져 있다.
 
권상범 명장(왼쪽)과 그의 뒤를 이어 제과제빵의 길을 걷고 있는 큰아들 권형준 대표.

오랫동안 리치몬드 과자점은 홍대 앞 랜드마크였다. 83년부터 2012년까지 30년 가까이 그 자리를 지켰다. 하지만 오르는 임대료를 감당할 수 없게 된 그는 결국 2012년 홍대 앞 가게를 떠나야 했다. 이 소식이 알려지면서 많은 사람이 그의 가게를 찾아왔다. 그의 빵을 먹으며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들, 자녀들에게 리치몬드 과자점의 빵을 사다 주며 행복했던 어르신들이 홍대 앞 리치몬드의 추억을 되새겼다.

그곳에서의 마지막 며칠 동안 그는 제빵사 복장을 차려입고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했다. 현재는 성산점과 이대점 등에서 리치몬드 과자점의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지난해 과자점을 첫째 아들 권형준 대표에게 물려줬지만 권 명장은 요즘도 매일 가게에 나온다. 가게를 둘러보며 진열된 빵을 살핀다.

“빵 만들 때 가장 중요한 게 바로 정성, 그리고 재료예요. 그렇게 잘 구워낸 빵은 잘 관리해야 합니다. 조금이라도 상태가 안 좋은 빵은 바로 치워요. 그게 바로 우릴 찾아온 손님에게 감사하는 방법이니까요.”

글=송정 기자 song.jeong@joongang.co.kr
사진=김경록 기자 kimkr8486@joongang.co.kr

송정 기자asitwere@joongang.c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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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록 기자kimkr8486@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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