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 바로가기 선택
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글자크기 글자 크게글자 작게 프린트

[당신의 역사] 본드칠 하던 중졸 ‘시다’에서 대통령의 구두 만드는 ‘마스터’로

1 이 기사는 2015-08-12 오전 00:02:00 에 실린 기사입니다.

30년 구두 장인 서문수용씨
 
2000여 족에 달하는 금강제화의 구두 샘플 사이에서 서문수용씨가 포즈를 취했다. 최고급 남성 정장구두 라인 ‘헤리티지’와 주문 제작 방식으로 만드는 ‘비스포크’ 제품은 모두 서문수용씨의 손을 거쳤다.


서문수용(62)씨는 전두환, 노태우, 노무현, 이명박 전 대통령의 발 모양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전두환 대통령은 발등이 낮았고, 노무현 대통령은 반대였죠. 부드러운 구두를 좋아했구요.” 서문씨는 30여 년간 구두를 만들었다. 구두의 틀을 만들고 가죽을 재단해 이어 붙이는 패턴사로 일했다. 해외 명품 구두 브랜드에서 ‘마스터’라고 부르는 구두 장인이다. 청와대의 요청으로 제작하게 된 역대 대통령들의 구두도 금강제화에서 고급 남성 정장화를 만들던 그의 손을 거쳤다. 자신의 인생이 “구두로 인해 좋은 곳에 왔다”고 말하는 사람. 평생을 구두와 함께한 그의 인생 이야기를 들어 봤다.

 전북 장수군 장계면 금덕리 위동. 서문수용씨는 그곳에서 4남 1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돼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이어 형 둘과 누나도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 홀로 농사를 지으며 그와 형을 키웠다. 그는 중학교를 졸업한 1968년 먼저 서울에서 일하던 형을 따라 어머니와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에 오는 게 얼마나 좋았는지 몰라요. 농사 안 지어도 되니까.”

 알고 지내던 형의 제안으로 금강제화 공장에 들어갔다. “당시엔 구두 하면 앞으로 쭉 먹고살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했어요. 5년만 고생하면 ‘선생’이라 불릴 만큼 대접도 받고요. 그 얘길 듣고 ‘이거다’ 싶어 망설이지 않고 취업했죠.” (※당시 제화업계에서는 미싱사를 ‘선생’이라 부르며 대우해 줬다.)

 60년대 말엔 대부분 수제 구두를 맞춰 신었다. 구두 만들 재료가 없어서 미군이 신던 군화를 분해해서 쓰던 시절이었다. 당시 금강제화도 대량 생산 라인 공장 외에 소량 주문 제품을 만들 수 있는 수제화 라인을 함께 운영했다.

 제화는 크게 두 분야로 나뉜다. 발을 감싸는 가죽 부분을 총칭하는 ‘갑피’ 분야와 밑창 부분을 일컫는 ‘바닥’ 분야다. 갑피는 구두 패턴을 뜨고 가죽을 재단해 미싱으로 잇는다. 바닥은 ‘라스트’라 불리는 발 모형을 제작하고 신발 디자인에 맞는 밑창을 만든다. 서문씨는 이 중 갑피 분야의 전문가다. 처음엔 미싱사가 가죽을 잘 꿰맬 수 있게 밑작업을 하는 일명 ‘시다’(조수)였다. 종일 본드칠만 했다.

 선배들은 굉장히 엄했다. 기술은 잘 안 가르쳐 줬다. 하지만 눈썰미가 좋았던 그는 뭐든지 빨리 배웠고 빨리 따라 잡았다. 본드칠만 하던 보조에서 하급·중급·상급 견습생으로 빠르게 나아갔다. 입사한 지 4년 만에 ‘선생’이라 불리는 정식 미싱사가 됐다.

 그는 당시 자신을 돌봐준 엄기종씨를 잊지 못한다. 그에게 엄씨는 ‘스승’ ‘선생님’이다. “내가 남들보다 빨리 미싱사가 된 건 전부 선생님 덕이었죠. 내가 아무리 빨리 배운다고 해도 선생님이 독립시켜 주지 않으면 안 되는 거였어요. 선생님이 날 예뻐하셔서 에스콰이어에 미싱사 자리가 난 걸 알아봐 주시고 독립시켜 주셨어요. 그때부터 미싱 타는 ‘선생’이 됐죠.”

돈 더 버는 야간작업 대신 공부를 했죠

71년 남들보다 빨리 미싱사가 된 그는 섬세한 솜씨를 인정받아 개발실로 옮겼다. 그곳에서 미싱이 아닌 패턴을 배웠다. 패턴은 ‘갑피의 꽃’이라고 불리는 중요한 공정이다. 그는 그곳에서 3년간 패턴 조수로 일했다. 아침에 일찍 출근해 청소하고 선배들의 책상을 닦았다. 연필 한 자루 한 자루를 공들여 깎아 놓고 잔심부름도 신나게 했다. 선배 패턴사가 퇴근하면 저녁을 먹고 들어와 하루 3시간 이상 혼자 패턴 연습을 했다. 선배가 그린 구두 패턴을 어깨너머로 보고 기억해 뒀다가 그렸다.

 “선배가 빨리 안 가르쳐주는 게 서운했는데 나중에야 왜 그랬는지 알았어요. 속성으로 배우는 것보다 계단을 하나씩 올라가듯 꾹꾹 다져지는 걸 원하셨던 거예요. 나도 후배들을 가르치다 보니 같은 마음이 들더라고요. 기본기가 차곡차곡 잘 다져지면 응용하는 건 쉽거든요. 도제식이 힘들긴 하지만 실력을 쌓는 측면에서나 선후배 사이의 끈끈함은 이 시대에 필요한 점이라고 생각해요.”

 미싱 야간작업을 하면 수당을 받을 수 있었지만 그는 대신 패턴 공부를 선택했다. “당장 돈 조금 더 버는 것보다 패턴을 배워서 패턴사가 되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또래들이 학교에서 공부할 나이에 난 공장에 다녔잖아요. 친구들이 책으로 공부할 때 난 구두를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조수 생활을 한 지 5년 만인 75년에 그는 남성 구두를 만드는 패턴사로 정식 수령장을 받았다.


5년만 고생하면 선생 소리 듣는다 해서 시작했죠
70년대 망원렌즈 단 카메라 들고 김포공항 돌며 구두 공부
찍다 걸리면 필름 뺏기고…디자이너가 따로 없던 시절


 
패턴 조수로 일하던 73년(사진 위). 패턴사가 만들어 낸 패턴을 깔끔하게 정리하는 게 그의 일이었다. 패턴사는 구두의 본을 뜨는 역할을 한다. 아래는 1975년 에스콰이어에서의 패턴사 시절.


국내 구두업계 최초로 입체패턴 시작

당시 에스콰이어엔 남성 정장화 디자이너가 없었다. 멋진 남성 구두를 만들기 위해서는 더 좋은 구두 디자인이 필요했다.

 그는 망원렌즈가 달린 카메라를 들고 사람들이 신은 구두를 몰래 촬영하며 디자인을 연구했다. 명동 사보이호텔 뒤편 살롱화 골목과 김포공항은 좋은 구두 디자인을 공부할 수 있는 곳이었다. 공항에서는 해외를 다녀온 사람들이나 외국인이 신은 신발을 사진 찍었고, 명동에서는 당시 유명했던 사루비아·엘리자벳·잉글랜드 등 유명 제화점에서 선보인 최신 구두를 찍곤 했다. 건너편 골목에 들어가서 몰래 찍고, 조명이 안 터지는 특수 필름도 사용했다. “사진 찍은 걸 들키면 필름을 뺏겼어요. 몰래 찍느라 땀 좀 흘렸죠.”

 76년엔 입체패턴에 도전했다. 그전까지 국내에선 모두가 평면패턴을 떴다. 서문씨는 당시 한국을 생산기지로 썼던 일본 바이어들과의 미팅 자리에서 자기네들은 ‘입체패턴을 뜬다’는 얘기를 듣고 바로 실행에 옮겼다.

 “아마 제가 국내 구두업계에서는 처음 입체패턴을 떴을 거예요. 당시는 모두 평면패턴을 뜨던 때라 내가 그렇게 하니 다른 사람들은 ‘왜 가르쳐준 대로 안 하고 마음대로 하느냐’고 했죠.” 하지만 평면패턴으로는 발이 편하지 않다는 게 알려지면서 지금 국내는 모든 제화업체가 입체패턴을 뜬다.

업체마다 다른 신발 치수 규격화 참여

82년 그는 금강제화로 다시 돌아갔다. 본드칠 하던 미싱사 조수에서 구두를 디자인하고 패턴을 뜨는 패턴사가 돼서 돌아간 거다.

 당시 금강제화의 공장은 5곳으로 서울 금호동과 경기도 조치원, 부평, 부천, 고산동에 있었다. 그는 부평 공장의 패턴사로 갔다. 남성 정장구두를 만드는 유일한 디자이너이자 패턴사였다.

 83년에는 한국과학기술원이 주관한 국민 신발 규격 정리 사업에 참여했다. 당시 국내 구두 회사는 2500여 개에 달했지만 사용하는 신발 규격이 제각각이었다. 한국과학기술원이 나서 당시 ‘빅3’ 업체였던 금강·에스콰이어·엘칸토의 관계자들과 표준화 작업을 시작했다.

 패턴사로는 그가 유일하게 참가했다. 금강제화에 찾아왔던 연구원이 그와 몇 마디 나눈 후 꼭 참석해 달라고 요청했기 때문이다. 4개월간 모여 세미나를 한 후 신발 규격을 정했다.

 “고객들이 좋아했어요. 어느 매장에서나 자신에게 맞는 사이즈를 찾을 수 있게 됐으니까요. 그전까지만 해도 자기 발 크기가 260mm이라고 해도 어디는 250, 어디는 270을 신어야 맞았거든요.”


국내 시장 전성기 90년대, 명절·진학 선물로 의미 남달라
대통령 중에선 발 특이했던 전두환·노무현 인상에 남아
숙명 같았던 직업… “구두로 인해 좋은 곳에 와”


 
1991년 금강제화 쇼룸에서. 당시 그는 패턴 담당 과장으로 일했다.


80~90년대 밤낮없이 돌던 공장

그가 기억하는 한국 제화의 황금기는 80년대 말~90년대 초반이다. 80년대 말까지는 수출 물량을 맞추기 위해, 그 이후엔 내수로 밤낮없이 공장이 돌았다.

 “88올림픽 이후 많은 게 달라졌어요. 수출 위주였다가 내수 시장으로 방향을 바꿨죠. 국내 시장이 그만큼 커졌으니까요. 제화회사들은 앞다퉈 다양한 구두를 선보였죠.”

 90년대 초반까지는 구두 내수 시장이 정말 좋았다. 만들면 팔렸다. 당시 구두는 최고의 선물이었다. 명절이나 연말에 좋은 선물을 해야 할 경우가 생기면 구두를 선물했다. 자녀나 조카가 대학에 가면 꼭 구두를 사줬다. “성인이 됐다는 걸 상징하는 선물이었죠. 정장 구두를 신으면 어른이 된다는 의미가 있었어요. 지금은 구두 선물이 옛날 같은 가치를 잃어서 섭섭해요.”

 금강제화는 당시 국내 구두 브랜드 가운데 명품으로 인정받았다. “당시엔 손에 빨간 쇼핑백(금강제화 쇼핑백) 하나 들고 명동길을 걸으면 어깨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니까요. 지금 해외 명품 브랜드 쇼핑백처럼요.”

 요즘 구두 회사들은 빈번하게 세일을 하지만 당시 금강제화는 1년에 딱 한 번만 세일을 했다. 세일 기간이 되면 명동 입구에 구두를 사려는 사람들이 긴 줄을 섰다. 특히 겨울이면 구두 소비가 늘어나 공장이 이틀에 한 번씩 야간작업을 해야 할 정도였다.

 94년 그는 금강제화 개발라인을 책임지는 개발실장이 됐다. 당시 디자인했던 모델명 ‘MPX0025’의 남성용 옥스포드화는 2007년까지 수십 만 족이 팔렸다. “당시 금강제화의 영업사원은 모두 이 신발을 신고 나갔어요. 구두 회사의 영업사원이 신는 ‘가장 좋은 구두’로 선택된 거죠.”

 97년 외환위기(IMF)로 구두 시장은 큰 타격을 받았다. 만들면 팔렸던 구두는 이후 점점 고가 시장과 저가 시장으로 양분화됐다. 서문씨는 고급 구두에 승산이 있다고 보고 최상위 남성 라인인 ‘헤리티지’의 구두 개발에 주력했다.

 “국내 구두 시장이 침체했지만 요즘 젊은 세대는 다시 수제화를 신기 시작했어요. 지금도 헤리티지의 일부 모델은 사전주문을 몇 백 족씩 받을 정도로 인기가 있어요.”

 그는 2007년까지 금강제화에서 구두를 만들었다. 그 후에도 고급 패턴 기술 보유자로 인정받아 프리랜서로 구두를 만들고 있다.

 
서문수용씨가 구두에 새겨넣을 문양을 그리고 있다.


TV에 대통령 나오면 구두만 봤어요

서문씨는 금강제화에서 일하며 전두환, 노무현, 이명박 전 대통령의 구두를 만들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의 골프화도 제작했다.

 대통령의 신발은 청와대에서 디자인을 내려줬다. 의전 비서관들이 좋아하는 디자인을 얘기해주기도 하고 대통령이 좋아하는 구두를 가져오기도 했다. 그러면 라스트를 만드는 저부사가 대통령의 발에 맞는 라스트를 깎고 서문씨가 디자인에 맞는 패턴을 떴다.

 기억에 남는 건 전두환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의 구두다. 두 사람의 발 모양이 일반인들과 조금 달랐기 때문이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발등이 낮은 편이에요. 눈에 띄지 않는 단순한 디자인을 좋아했죠. 반대로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발등이 높고 발이 예민해서 부드러운 신발을 원했어요. 그래서 늘 부드럽고 가벼운 특수 솔(깔창)을 썼죠.”

 그가 만든 구두를 대통령들은 외국 순방길이나 국내 행사 때 신었다. 그래서 서문씨는 “대통령이 뉴스에 나오면 얼굴 안 보고 늘 신발을 봤다”고 했다. 자신이 만든 구두를 대통령이 신고 나오면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 없었다.

 중학교 시절 마라톤 선수였던 그는 자신의 지난 인생이 돌아보며 마치 마라톤 같았다고 했다.

 “어느 시점엔 올라가고, 어떨 땐 내려갔어요. 하지만 시골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나 한국을 대표하는 구두 회사에서 일했고, 대통령의 구두까지 만들어봤으니 이만하면 성공한 거 아닌가요. 구두는 내 숙명이었고, 그 숙명을 따른 지난 세월에 후회는 없습니다.”

 
▷여기를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글=윤경희 기자 annie@joongang.co.kr, 사진=김경록 기자 kimkr8486@joongang.co.kr 

윤경희 기자annie@joongang.co.kr
강남통신·열려라공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김경록 기자kimkr8486@joongang.co.kr
강남통신·열려라공부 사진담당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