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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역사] 유대인 교육법 국내 소개한 류태영 박사

1 이 기사는 2015-07-08 오전 00:02:00 에 실린 기사입니다.

넘어진 아이 스스로 일어날 때까지 기다려 주세요

 
한국성서대 ‘류태영 박사 기증 도서실’에서 류태영 박사가 이스라엘 관련 서적을 펼쳐보고 있다. 류 박사는 2013년 연구에 활용하던 1만여 권의 책을 이 학교에 기증했다. 학교는 그의 이름을 따 도서실 이름을 지었다.


넝마주이 전전한 ‘머슴의 아들’ 공부만은 포기 못해
주소도 없이 ‘덴마크 국왕 귀하’ 편지…1호 유학생 돼
집단농장 전문가로 ‘근면·자조·협동’ 새마을운동 주도



찢어지게 가난했다. 구두닦이·신문배달·넝마주이까지 안 해본 일이 없었다. 영양실조에 걸려 길거리에서 쓰러지기도 여러 번, 폐결핵에 걸려 죽을 뻔한 적도 있다. 너무 배가 고파 쓰레기통에 버려진 밥 덩이의 흙을 털어내고 먹기도 했다. 그래도 공부만은 절대 포기할 수 없었다. 새마을운동 창시자이면서 유대인 교육 전문가로 알려진 사회학자 류태영(79)박사 얘기다. 전북 임실군에서 머슴의 아들로 태어나 한국인 최초로 덴마크·이스라엘 유학을 거쳐 한국 농촌개발의 한 획을 긋기까지, 그의 인생은 도전의 연속이었다. 류 박사는 “명문대·대기업만이 목표가 돼버린 지금의 한국 교육은 근본부터 잘못됐다”고 말한다.


“못 배우면 평생 머슴으로 살아야 한다”
 
54년 서울 상경 직후 미군부대 구두닦이를 하던 때.
“송피(松皮)라고 알아? 소나무 겉껍질을 벗기면 하얀 껍질이 나와. 그걸 벗겨다가 삶아서 독기를 빼고 절구에 찧은 다음에 도토리·수수 가루를 넣어서 떡을 만들어. 그게 밥이야. 그거라도 먹을 수 있으면 다행이지. 매일 굶는 일이 일상이었어.”

 류태영 박사는 1936년 전라북도 임실군에서 머슴의 아들로 태어났다. 8남매 중 다섯째였다. 아버지는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고되게 일했지만 8남매는 끼니 때우기도 힘들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형편이 어려워 그도 아버지를 따라 머슴살이를 했다. 가난이 지긋지긋했다.

 하지만 한 가지 생각만 점점 또렷해졌다. ‘배워야 한다. 배우지 못하면 평생 머슴으로 살아야 한다.’ 아무리 어려워도 공부에 대한 꿈만은 포기하지 않았다. 낮에는 남의 집 머슴으로 지게를 지고, 밤에는 책을 봤다. 18세에 겨우 중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고등학교에 가고 싶었지만 근처에 진학할 수 있는 고등학교가 없었다. 두 형은 머슴으로, 두 누나는 식모로 일했다.

 절박했다. 공부만이 살길이라고 생각했다. 고민 끝에 어머니 앞에 무릎을 꿇고 말했다. “서울로 가겠습니다. 제가 벌어 혼자 힘으로 학교에 가겠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의 서울행 차비를 위해 빚을 냈다. “샛거리라고 해서 몇 달 후에 두 배로 갚아야 하는 고리대금이 있었는데, 어머니가 백방으로 뛰면서 쌀 한 가마니 값을 겨우 마련해온 거야. 그 돈을 받아쥐고 서울행 열차를 타는데, 그렇게 서러울 수가 없더라고.”

 54년 여름, 류 박사는 무작정 서울로 상경했다. 수중의 돈도, 서울에 아는 사람도 없었다.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쓰레기 더미를 뒤져 폐품을 주워 파는 넝마주이도 해보고, 신문배달도, 미군 부대 구두닦이도 했다. 그렇게 새벽부터 밤까지 일하고, 그 돈으로 겨우 학비를 마련해 야간고등학교를 다녔다.


“농업 선진국 덴마크 배우자” 유학 도전
 
1968년 덴마크 유학 시절 덴마크 교회부 장관 포르그 페더슨과 함께.
류 박사는 당시 정치대(현 건국대) 법률학과를 졸업한 뒤 한국성서대 기독교 교육학과에 학사 편입했다. 대학을 다니면서도 공장 청소부, 입주 가정교사 등 학비를 벌기 위해 무슨 일이든 했다. 항상 배고픔에 시달려야 했다. 그래도 견뎌냈고, 끝내 혼자 힘으로 대학까지 졸업했다. 그는 “꼭 이루고 싶은 꿈이 있었다”고 말했다. “아버지가 정말 성실했는데도 먹고 살기가 힘들었어.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결국 도달한 결론은 아버지 잘못이 아니라는 거였지. 농촌이 낙후되고, 나라가 가난한 게 근본적인 문제였던 거야. 그런 결론에 도달하니까 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가 더 뚜렷해졌어.”

 60년대 중반 농촌 부흥은 그의 일생의 목표가 됐다. 그는 “성공한 나라를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머릿속엔 야간고등학교 시절부터 덴마크가 자리 잡고 있었다. 덴마크는 당시에도 세계적인 농업국가로 선진국 반열에 올랐던 나라였다. ‘덴마크를 가자. 그곳에 내 갈 길이 있을 거야.’ 하지만 당시 한국에 덴마크 대사관도 없던 시절이다. 유학을 도와줄 기관도, 물어볼 사람도 없었다. 아무리 고민해도 방법이 없었다. 그런데 의외로 간단한 결론에 도달했다. 세상만사, 마음먹기 달렸다고 했던가. ‘겁낼 게 무어냐. 몸뚱이 하나로 여기까지 왔으니, 몸뚱이로 부딪혀야지.’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지체 없이 행동에 옮겼다.

 68년 초여름 무작정 덴마크 국왕에게 편지를 썼다. 주소도 없는 ‘황당한’ 편지였다. 봉투에 ‘프레데릭 9세 국왕 귀하, 덴마크 코펜하겐’이라고만 적었다. “덴마크에 대해 물어볼 사람도 없고, 지금처럼 인터넷도 없던 시절이라 덴마크 국왕이 사는 곳을 알 수가 있나. 참 황당하고 무식한 방법이지만 그 방법밖에는 없었어. 하하.”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다. 강하게 마음으로 염원하면 이루어진다고 했다. 고작 ‘프레데릭 9세 국왕 귀하, 덴마크 코펜하겐’이라고만 적은 편지에 정말로 덴마크에서 답장이 날아왔다. 회신 편지엔 꿈같은 말이 적혀 있었다. “당신이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장소에서, 원하는 기간만큼 공부할 수 있도록 모든 지원을 하겠다.” 그는 지금도 그때 상황을 ‘기적’이라고 표현한다. “그때 전 세계 국가 수가 179개국이었는데, 그중에 한국은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170위였어. 100달러도 안 됐단 말이야. 북한이 더 잘 살았을 정도니까. 그런 가난한 나라에서 날라온 편지 한 통이 그들의 마음을 움직였던 거야.”

 덴마크 외무성 초청으로 68년 7월 덴마크 유학길에 올랐다. 모든 비용은 덴마크 정부에서 부담했다. 한국인으로는 첫 덴마크 유학이었다. 그렇게 1년 6개월 동안 덴마크 노르딕 농업대에서 농촌사회개발을 공부했다. 그리고 내친김에 이스라엘 대통령한테도 편지를 부쳤다. 이스라엘에서도 초청장이 날라왔다. 69년 11월부터 6개월 동안 이스라엘로 가 농촌개발과정을 연구했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부딪혀보자’는 과감함이 만들어낸 기적이었다.


“박정희 대통령 추진력 대단했어요”

70년 4월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덴마크와 이스라엘의 집단농업체제를 공부한 유일한 전문가였다. 건국대에서 학생들을 지도하던 중 청와대가 그를 불렀다. 오후 5시쯤 청와대로 들어갔다. “청와대 핵심 참모들이 5시간 동안 내 얘기를 듣더니 곧바로 박정희 전 대통령께 보고하더라고. 그 자리에서 결정이 났어. 박 대통령께서 나한테 당장 내일부터 청와대로 들어와서 농촌운동 하라고 하더라고. 정말 박 대통령의 결단력과 추진력은 대단했어.” 다음 날 아침 일찍 학교에 나가보니 학교 측에도 이미 청와대로부터 전화가 온 상태였다. “총장님이랑 이사장님이 나를 갑자기 급하게 찾아. 어젯밤 12시가 넘어 청와대에서 ‘내일 아침 류태영 선생이 출근하면 아무런 불편한 마음이 들지 않도록 분위기를 조성해 청와대로 보내라’고 전화가 왔다는 거야.” 드디어 꿈을 펼칠 기회가 온 것이다.

 70년대 초 농촌의 상황은 심각했다. 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7~71년)이 성과를 드러내며 연평균 9.7%의 고성장을 이어갔다. 하지만 이는 공업 분야에만 해당하는 불균형 성장이었다. 전체 산업 성장률은 9.7%를 기록했지만 농림어업의 성장률은 연평균 1.5%에 머물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심각한 가뭄까지 겹쳐 도시와 농촌의 소득 불균형 현상은 더 심해졌다. 국가적으로 농촌의 발전 로드맵이 시급하게 요구됐다. 새마을운동이다. “기회는 언제 올지 아무도 몰라. 꿈을 좇아 덴마크·이스라엘을 다녀왔기 때문에 천운의 기회를 얻을 수 있었던 거지.”

 72년 3월 류 박사가 초대 새마을 담당으로 임명됐다. 그는 덴마크 부흥운동을 모티브로 삼아 ‘근면·자조·협동’을 주요한 가치관으로 삼은 새마을운동을 제창했다. “무엇보다 농촌에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는 것이 급했어. 도로·하수도·지붕 개량과 같은 농촌 환경 개선 운동을 벌이면서 품종개량·비닐하우스 보급 등을 통해 소득증대를 꾀하고자 했던 것이 바로 새마을운동이야.” 새마을운동은 빠르게 성과를 나타냈다. 농촌 새마을운동에서, 직장·도시·학교 새마을운동으로 번지며 전 국가적인 근대화 운동으로 발전했다.


73년 이스라엘 유학길…“한국 성장하려면 교육이 변해야”
지식이 아니라 지혜를 가르치는 유대인 양육법 첫 강연
“등 떠밀려 공부하는 한국 아이에게 자립심을 키워주세요”


 
78년 이스라엘 벤구리온대 교수 시절 제자들과 함께.


동양인 최초로 이스라엘 대학 교수가 돼

류 박사는 73년 7월 돌연 이스라엘 유학길에 오른다. 새마을운동을 주도하며 박 대통령의 측근으로 떠올랐다. 마음만 먹으면 청와대를 등에 업고 한 자리 꿰차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실제 육영수 여사는 그에게 국회의원 자리를 추천하기도 했다. 류 박사는 그 제안을 거절했다. “새마을운동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가니까 다시 공부 욕심이 나더라고. 그때 이스라엘은 가장 역동적으로 농촌이 변화하고 있던 나라였거든. 69년의 6개월 동안의 연구는 그런 이스라엘을 이해하기엔 너무 짧았어. 키부츠·모샤브 등 집단농업체계를 더 깊이 있게 연구하고 싶었어.”
 
74년 이스라엘 유학 시절 가족과 함께. 왼쪽부터 첫째 소미, 부인 이소영씨 , 둘째 근호 , 류태영 박사.
 다시 또 이스라엘 대통령에게 편지를 썼다. 이스라엘은 흔쾌히 그를 받아줬다. 전액 장학금뿐 아니라 현지 주택과 생활비까지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가족과 함께 이스라엘로 떠났다. 예루살렘 히브리대 대학원 사회학 석·박사 과정에 입학했다. 덴마크에 이어 이스라엘 유학도 그가 한국인으로는 최초다. 보통 8년이 걸린다는 석·박사 과정을 4년 만에 끝냈다. 역대 최단 기록이었다. 우수함을 인정받아 이스라엘 벤구리온 대학에 교수로 초빙됐다. 동양인 중엔 최초로 이스라엘 대학 교수가 됐다.

 이스라엘 유학은 그의 인생에서 커다란 전환점이 됐다. 그는 농촌뿐 아니라 유대인의 교육에 깊은 관심을 두게 됐다. 두 아이를 이스라엘 유치원과 초등학교에 보내면서 경험했던 유대인 교육은 충격이었다. 류 박사는 “유대인은 ‘지식’이 아니라 ‘지혜’를 가르친다”고 표현했다. 그의 설명은 이렇다. “우리는 얼마나 많이 암기하고 있는가를 최고로 치잖아. 그런데 유대인들은 달라. 한 예로, 유대인 엄마들은 ‘오늘 학교에서 뭘 배웠니?’라고 묻지 않고 ‘오늘 학교에서 무엇을 질문했니?’라고 물어. 질문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거야.”

 아이들이 다녔던 유대인 학교 수업은 언제나 시끌시끌했다. 수업 내내 교사와 학생 사이, 또 학생 사이에 질문과 답변이 오가느라 한시도 조용할 때가 없었다. 옆에서 보면 마치 싸우는 것으로 착각할 정도로 토론은 격렬했다. “노벨상 수상자의 26%가 유대인이야. 특히 물리학·화학 등 과학 계통 노벨상은 60%가 유대인 차지라고. 이스라엘을 경험해 보고서야 그 이유를 알겠더군.”


“내가 원해서 한 공부라서 포기 안 했죠”
 
81년 건국대 제자들과 함께 이스라엘 견학 .
78년 9월 류 박사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건국대 교수로 임용돼 농촌사회학을 가르쳤다. 그는 이스라엘을 경험하면서 한국이 더 성장하기 위해선 교육이 바뀌어야 한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경제수준이 올라가면서 영재교육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이제 단지 먹고 사는 문제가 아니라 어떤 인재를 길러내느냐가 중요한 문제라고 판단했다. 입시 경쟁이 아닌 창의적이고, 융합적인 사고력을 갖춘 인재를 길러내야 한다는 것이다.

 류 박사는 그 단초를 유대인들의 자녀 교육에서 찾았다. 한국 사람 중에 이스라엘에서 자녀를 학교에 보내보고, 유대인 교육 현장을 경험해 본 사람은 류 박사가 처음이었다. 한국에 유대인 교육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78년 겨울 이화여대부속초에서 500여 명의 학부모를 대상으로 첫 강의를 했다. 반응이 좋았다. 강의 요청이 쇄도했다. 강의료가 얼마인지 묻지도 않았다. 전국 어디든 달려갔다. 유대인 교육을 알리는 것이 한국 교육을 바꾸는 데 작은 힘이나마 보탰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그는 그렇게 37년째 강연과 저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2001년 건국대를 퇴임하고 이듬해 청소년 장학사업을 위한 재단을 설립했다. 강연료와 책을 쓰고 받은 인세 등을 모아 4억2000만원을 출현했다. 600여 명의 독지가가 함께했다. 매해 수십 명의 고등학생·대학생이 장학 혜택을 받고 있다.

 그는 “한국 교육이 방향을 잃었다”고 안타까워했다. “부모 욕심에 아이들은 등 떠밀려 공부한다”는 비판도 했다. 학생들의 목표는 오로지 명문대·대기업으로 좁아졌다. 그는 “아이 스스로 정말 원해서 하는 공부인지 등 떠밀려 하는 공부인지 곱씹어 보는 시간을 가지게 해줘야 한다”고 충고했다. “내가 어려운 환경에서도 끝까지 공부를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딱 두 가지였어. ‘내가 원해서 했다’는 것과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거든.”

 류 박사는 이스라엘에서 한 유대인 부모의 가정을 방문했을 때 일을 들려줬다. 그 유대인 부모는 아이에게 걸음마를 가르치고 있었다. 아이가 뒤뚱거리다 넘어지려 하자 류 박사는 망설임 없이 아이의 손을 잡았다. 그런데 유대인 부모의 반응이 황당했다. “한국에선 아이들을 다 그렇게 가르칩니까. 한국의 부모들은 아이가 쓰러지려 할 때 다들 그렇게 붙잡아 주느냐는 말입니다.” 류 박사는 서운한 마음에 맞받아쳤다. “물론 그렇죠. 아이가 다칠 수 있는데 당연한 거 아닙니까.” 그다음 이어진 유대인 부모의 말에 류 박사는 할 말을 잃었다고 한다. 그 유대인 부모는 이렇게 답했다. “사람은 결국 혼자 살아가야 합니다. 이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부모의 손이 아니라 스스로 일어나겠다는 의지입니다. 자립심을 길러주는 것이 바로 최고의 교육입니다.”

 
 


글=정현진 기자 Jeong.hyeonjin@joongang.co.kr 사진=김경록 기자 kimkr8486@joongang.co.kr

정현진 기자 correctroad@joongang.co.kr
강남통신·열려라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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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록 기자kimkr8486@joongang.co.kr
강남통신·열려라공부 사진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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